너는 지금부터 바보가 되어 참구하되, 다른 사람이 한 번 바보가 되면 너는 열 번 바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화두를 타파하고 보면 환하게 알게 된다. - 1992년 진제 선사의 부산 해운정사 법문.
조사선은 송나라 대혜 종고 스님이 구체적인 수행법인 간화선으로 정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간화선은 역대 조사들이 남긴 화두인 공안(公案)을 참구하면서 깨침에 이르는 길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은 간화선의 종주국으로서 명성과 역량을 쌓아왔다. 종단 인가 100여 개 선원에서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참선정진하는 출가수행자의 숫자만 연인원 5,000명에 이른다. 이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풍경이다.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매개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이다. 간화(看話), 말 그대로 화두를 주의 깊게 참구하는 수행법이다. 일반적으로는 참선(參禪)이라 한다. 말 그대로 선의 세계로 참여하기 위해 진입하는 일이다. 화두는 그 실마리가 된다. 화두를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말머리’다. ‘말머리를 돌리다’ ‘말머리를 바꾸다’ 등의 관용구에서 보듯, 이야기의 소재 또는 주제를 의미한다. 세속에서 ‘내 인생의 화두’, ‘인류문명의 화두’처럼 일상어로 쓰이기도 한다. 선불교에서도 화두는 말머리를 돌리거나 바꾸는 용도이다. 언어에 의한 관념적 사고를 초월해 이른바 ‘말길이 끊어진 경지’에 다다르고자 한다.
선불교에서 화두는 매우 다채롭다. 그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검증된 화두를 공안(公案)이라 한다. ‘공안’이란 원래 국가기관의 공문서를 뜻한다. 국민들이 공문서의 내용을 준수해야 하듯, 선 수행자들은 무릇 불조가 제시한 불법의 도리인 공안을 따른다. 송대까지 전해져 내려온 공안은 1,701개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중국의 유명한 선승들의 언행에서 유래한 화두들이다. 과거부터 이어온 참되고 절대적인 법칙이란 의미에서 고칙(古則)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두의 유래가 되는 서사의 구조는 유사하다. 대부분 문답의 형태를 띠고 있다. 누군가 도(道)에 대해 물으면 어떤 스님이 답을 해주는 형식인데 그 대답이 기상천외하다. 예컨대 도에 대해, 또는 불법(佛法)의 대의(大義)에 대해, 또는 ‘조사(祖師: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祖師西來意]’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일반적인 사상가나 종교인이라면 으레 진리라거나 사랑이라거나 정의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선사들은 대답으로 도(道)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물이나 사태를 제시한다. 도는 ‘똥 막대기’라거나 ‘뜰 앞의 잣나무’라거나 ‘버드나무 가지’ 라거나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는데 오직)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 등등. 이 뜬금없는 말을 들은 수행자는 의심을 가지게 된다. ‘왜 도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을까?’ 뚱딴지같은 대답에 의심을 품고 그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간화선의 출발이다.
“선문답하고 앉았네.” 문제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엉뚱한 대답을 내놓을 때, 우리가 상대방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마치 선문답을 하듯이, 범죄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정치인들은 오리발을 내민다. 피상적으로 보면 선문답(禪問答)은 논리적으로도 문법적으로도 틀리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가면 틀림으로서 오히려 옳은 말이다. 전형적이고 관행적인 사유의 길을 끊어버림으로써, 주체적이고 혁신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선가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는 까닭은 언어 너머의 실체를 인식하기 위함이다. 물론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언어로 문명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언어 때문에 서로 싸우고 차별하고 고집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진리’라는 단어가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사랑이나 정의도 마찬가지다. 그 언어적 개념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현상은 없다. 사람은 이렇듯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언어의 틀 안에 갇혀서 산다. 더구나 사람은 대부분 언어 때문에 아프고 언어 때문에 싸운다. 누가 기분 나쁜 말을 하면 불쾌해지고 누가 ‘너는 틀렸다’고 말하면 분노한다. 말에 갇혀서 말에 다친다. 이처럼 언어는 분별을 부추긴다. ‘즐겁다, 괴롭다’ 혹은 ‘옳다, 그르다’는 분별심은 거의 말 때문에 생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참선 수행자들은 묵언(默言)을 지킨다. 침묵하면서 고요히 내면을 응시한다. 그들은 이것과 저것, 나와 너 등의 사량(思量) 분별이 끊어진 자리를 궁구한다. 언어가 차별을 낳고 갈등을 유발하는 탓이다. ‘나’라고 규정하면 나 이외의 것들과 경계가 생기고 거리가 생긴다. 내가 더 가지고 싶고 남이 내 것을 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진제 선사는 “특정한 현상과 조건으로서의 자아가 아닌 마음의 본래자리를 통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분별심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는 늘 한계에 부딪힌다. “우리는 본래 부처인데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나’라고 동일시함으로써 무한한 부처님의 생명력이 탐욕으로 굴절되고 이기심으로 쪼그라들어 나타난다.”는 것이 선사의 통찰이다.
화두와 묵언
인간이 말을 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말하면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한다. 거래를 트기 위해 속삭이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언어는 이와 같이 진심이 아닌 욕심과 연결되어 있다. 반면 화두는 진실규명과 문제해결의 열쇠이다. 당나라의 운문 문언(雲門文偃, 865-949) 선사는 도가 똥 막대기라고 말했고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했다. 도는 뭔가 그럴듯하고 성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범부(凡夫)들의 머리에 경종을 울린다. 산다는 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죽는다는 건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부숴버린다. 목숨에 집착하고 좋음에 집착하는 한, 죽음에 몸서리치고 싫음에 미쳐버린다.
· 집필자 : 장영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