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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이란 ‘분별’하지 않는 것

지구촌의 평화와 화목과 평등, 건강한 생태환경은 인류 개개인이 마음을 닦는 수행을 통해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이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과 자연은 서로 상생의 관계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온 지구촌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나’를 찾아 마음의 고향에 이르게 되면, 자연과 인류가 상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생태계의 질서를 무너뜨려 고통을 불러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됩니다. 참선을 통해 참나를 발견하게 되면, ‘나’는 ‘우리’가 되고, ‘이기심’이 ‘이타심’이 되며, ‘아만심’이 ‘자비심’이 되어, 모두가 기꺼이 이웃을 돕고 우리의 보금자리인 지구촌을 보살피게 됩니다. 참나를 찾아 마음의 고향에 이르게 되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시비심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사라져 크게 지혜로워지게 되므로, 반목과 갈등 그리고 전쟁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2012년 10월 4일 뉴욕 UN플라자 빌딩(Millennium Hilton New York One UN Plaza)에서 열린 UN 세계종교지도자 모임에서 진제 선사가 설파한 법문의 일부이다. 지구촌 곳곳의 종교인들에게, 선불교의 진면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보인 사자후(獅子吼)다. 여기서 진제 선사가 말하는 ‘참나’란 시비분별을 초월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가리킨다. 선불교의 진면목이자 나 자신의 진면목이다. ‘참나’를 이루면 영원한 행복과 완전한 평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작고 초라한 신체가 아니라 온 세상이 내가 되기 때문이다.
UN 세계 종교 지도자 모임 법문
진제(眞際) 법원(法遠) 선사는 말 그대로 선사다. 일평생 선을 직접 수행하고 가르쳐온 위대한 스승이다. 그렇다면 선(禪)이란 무엇인가? ‘선’은 한자로 ‘고요할 선’이며 인도의 전통언어인 산스크리트어 dhyana의 음차(音借)다. ‘선나(禪那)’라고도 옮긴다. 뜻으로는 ‘정(定)’, ‘정려(精慮)’, ‘사유수(思惟修)’라고 번역한다. 곧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깊은 생각을 통한 수행, 정밀한 사유를 기반으로 한 수행이다. 나아가 마음의 지극한 고요함 속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것쯤으로 갈음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종(禪宗)’의 준말이다. 선종이란 서기 5~6세기 무렵, 동양화 장르인 ‘달마도’로 잘 알려진 달마대사에 의해 성립된 불교 종파다. 불교의 수많은 종파 가운데 하나이나, 그만의 독특한 고유성을 갖고 있어 ‘선불교(禪佛敎)’라고도 칭한다. 선종은 글공부와 학문 연구를 중시하는 교종(敎宗)과 달리 내면의 직접적인 각성을 지향한다. 화두(話頭)를 매개로 깨달음의 세계에 들고자 하는 수행법이다. ‘좌선’은 가부좌를 튼 채 앉아서 하는 수행인데, ‘화두’는 어떤 실마리가 되는 단어 또는 짤막한 문장이다. 교리를 번잡하게 들먹이거나 형식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선종의 대표적 특징이다. 경전을 오래 공부해서 비로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단박에 깨달으면 바로 부처가 된다. 선사들이란 선을 하는 큰스님들이다. 그들이 하는 선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분별(分別)’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도 간단하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순간, 욕심과 차별과 갈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앉아있게 되면, 서 있기가 싫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을 좋아하면 반드시 저것을 싫어하게 되고, 저것을 배척하며 이것을 더 갖기 위해 싸우게 된다. 따지고 보면 세상만사가 분별 때문에 불행해지고 틀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마음에 아무런 번뇌가 없다는 건, 분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룬 선사들은 집착이 없고 걸림이 없다. 무슨 일을 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한다. 선사들은 무심(無心)을 지향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마음에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이 분별이고 좋음과 싫음이 나뉘고 사랑과 미움이 나뉘기 때문이다. ‘앉아 있다’고 하는 미세한 생각조차 큰 화를 불러오는 미혹(迷惑)의 감정이기에 철저히 거부한다.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 없이, 특별한 의무감이나 책임감 없이, 부담감도 고통스러움도 없이, 그저 정직하고 성실하게 할 뿐이다. 그냥 그렇게 산다. 물론 무심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그저 멍하게 있는 표면적 의미의 무심이 전부라면, 천하의 바보천치나 혼수상태의 환자일 뿐이다. 선사들이 치열하게 수행하고 그것을 권하는 까닭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자각을 위해서다. 곧 나는 본래 부처님처럼 깨끗하고 숭고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그리고 분별하지 않는 무심이 그것을 충분히 가능하게 해준다. 내가 더럽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깨끗함을 고집하거나, 더러움을 멸시하거나,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따로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숭고하다’ 또는 ‘경박하다’는 생각도 이와 마찬가지다. 생각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 실체가 아니다.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며 양면적이다. 예컨대 쇠똥구리에게 똥은 똥이 아니라 밥이며, 물고기에게 바다는 물이 아니라 땅이다. 분별하지 않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차별하지 않고 만물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고요해져서 평화로워지고 평화로워져서 자비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선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의 경지다. 좋고 나쁨에 얽매이지 않는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수용한다. 균형감을 가지고 세상을 마주 대한다. 당장 나쁘다고 절망하지 않으며 당장 좋다고 나태해지지 않는다. 어떤 처지에 있고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 좀 힘들고 신세가 좀 궁하더라도 늘 당당하고 여유롭다. 그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덕분이다. 동시에 나와 똑같이, 연기법으로 나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존재가 부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언제나 너그럽고 자비롭다.
· 집필자 : 장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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