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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끝없는 점검

향곡 선사께서는 선사에게 전법게를 내린 뒤에도 끊임없이 선사의 안목을 점검하셨다. 어느 날, 향곡 선사를 모시고 산책할 때였다. 향곡 선사께서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수덕사(修德寺) 만공 월면(滿空月面, 1871-1946) 선사께서 열반에 드시고, 산중회의에서 고봉 경욱(古峰景昱, 1890-1961) 선사를 조실(祖室)로 모셨다. 결제일이 도래해 대중이 법당에 모여 고봉 선사께 법문을 청하자, 고봉 선사께서 법상에 오르려고 하셨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금오(金烏) 선사가 고봉 선사 뒤를 따라가다가 법상에 오르려는 순간 고봉 선사의 장삼 자락을 붙잡으며, 스님 법상에 오르기 전에 한 말씀해달라고 하셨다. 고봉 선사께서 장삼 자락 놓으라고 했지만, 금오 선사가 물러서지 않고, 한 말씀하고 오르시라고 하며 다그치자, 고봉 선사가 또, 장삼 자락 놓으라고 하셨다.
향곡 선사는, 만약 자네가 당시의 고봉 선사라면, 금오 선사가 장삼 자락을 잡고 한 마디 하고 법상에 오르라 할 때 어떻게 하겠냐고 물으셨다. 향곡 선사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선사가 스승의 면전에 벽력같이 “억!”하고 할(喝)을 했다.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얼굴을 찡그리며, 훗날 자네가 그렇게 후학을 지도한다면 모든 사람의 멀쩡한 눈을 도리어 멀게 할 것이라고 하며 책망하셨다. 이에 선사가 합장하고, 소승(小僧)의 허물이라고 하자, 향곡 선사께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노승(老僧)의 허물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느 날 향곡 선사께서 스승이신 운봉 성수(雲峰性粹) 선사의 일화를 들려주며 말씀하셨다.
1925년에 망월사望月寺에서 용성 진종(龍城震鍾, 1864-1940) 선사의 주도로 만일선회결사(萬日禪會結社)가 결성되었다. 당시 내로라하는 수좌 40여명이 결사에 동참하였다. 대중은 용성(龍城) 선사를 조실(祖室)로, 석우(石友) 선사를 선덕(禪德)으로, 운봉(雲峰) 선사를 입승(立繩)으로 모시고, 산문 출입을 금하고는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그렇게 여법하게 참선 정진에 임한 지 45일째 되는 날이었다. 조실이신 용성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법문하시기를, 이 산승(山僧)의 참모습은 과거 현재 미래의 어떤 성인도 보지 못하고, 역대 조사들 역시 보지 못하는데, 여기 모인 모든 대중은 어느 곳에서 이 산승을 보려는가 물으셨다. 그때 운봉 선사께서 일어나, 유리 독 속에 몸을 감추셨다고 답했다. 그러자 조실이신 용성 선사께서 말없이 법상을 내려와 조실방으로 돌아가셨다.
향곡 선사께서 잠시 침묵하다가, 용성 선사께서 그때 한마디 하고 내려오셨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셨다. 그리고 만약 자네가 당시의 용성 선사라면 운봉 선사께서 유리 항아리 속에 몸을 숨긴다고 할 때 어떻게 한마디 하겠는가 물으셨다. 이에 선사가, “사자 새끼가 송곳니가 나고 발톱이 날카로워지더니 멋들어지게 포효까지 한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맞다고 하시며 기뻐하셨다. 또 어느 날이었다. 선사가 향곡 선사를 모시고 마당을 거닐다가 불쑥, 스님 크게 깨달아서 만 중생을 제도하셨다지만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돈 잃고 억울하게 죄까지 뒤집어쓴 꼴이고 역대의 조사들 역시 돈 잃고 죄까지 뒤집어쓴 꼴이라고 말하자, 향곡 선사께서, 본인께서 할 말을 선사가 한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리셨다. 1971년, 선사께서 37세 되던 해였다. 깨닫고 보니,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은 재가자는 물론이고, 모든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누구나 시도하기만 하면 곧바로 인간 본연의 실상(實相)이 드러나게 하는 가장 훌륭한 수행법이었다. 또한, 산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병행해도 전혀 지장이 없는 수행법이었다. 밥 짓고, 빨래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화두를 참구할 수 있었다.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선물하신 이런 좋은 수행법이 구시대의 유물로 잊힌다는 것은 인류에게 크나큰 손실이었다. 이에 선사는, 궁극의 진실을 곧바로 드러내는 이 요긴한 수행법을 세상에 널리 전하리라. 그리하여 사람마다 자신에게 본래 갖춰진 대안락(大安樂) 대자유(大自由) 대지혜(大智慧)의 공덕을 맘껏 누리게 하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게 하리라고 큰 서원을 세웠다. 선사는 10여 년을 곁에서 모신 스승을 떠나 새로운 교화의 인연처(因緣處)를 탐색하다가, 부산 해운대 장수산에 이르렀다. 선사는 태백산맥이 굽이쳐 내려와 장중한 기운을 맺은 끝자리, 끝없이 펼쳐진 창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를 택해 터를 다지고 해운정사(海雲精寺)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간화선을 대중화, 생활화, 세계화하겠다는 서원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겼다. 스님들의 수행처인 상선원(上禪院)과 재가불자들의 수행처인 하선원(下禪院)을 개설하고 출가자 재가자 모두 여름과 겨울 석 달 동안 안거하였다. 또 매주 토요일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예불까지 직접 대중을 경책하며 철야 용맹정진을 시행하고,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참선법을 지도하였다. 자비로운 법의 향기는 산중을 넘어 세속까지 널리 퍼졌고, 명확하고 통쾌한 선사의 점검을 받기 위해 수많은 선객(禪客)들이 몰려들었다.
부산 해운정사
1979년(45세) 1월 12일(음력 1978년 12월 14일)이었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마당을 거닐 때였다. 향곡 선사께서 연락도 없이 찾아오셨다. 뭔가 못마땅한 일이 있으셨는지, 잔뜩 찡그린 표정이셨다. 얼른 달려가 인사를 드리자, 향곡 선사께서 선사를 마당에 세워놓고 다짜고짜, 선사에게 임제탁발화(臨濟托鉢話)를 아느냐고 물으셨다. 그 화두는 다음과 같다.
당나라 때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가 하루는 발우를 들고 집마다 돌면서 탁발을 했다. 대문을 두드리고, 탁발하러 왔다고 하면 다들 형편대로 쌀이나 돈을 조금씩 보시했다. 그러다 어느 집 대문을 두드리자, 노파가 문을 빼꼼히 열고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임제 선사가 탁발하러 왔다고 하자, 이 노파가 대뜸, 염치없는 중이라고 하고는 왈칵 대문을 닫아버렸다. 이에 임제 선사는 말없이 그냥 절로 돌아갔다.
향곡 선사는 이 화두를 거론하고, 만약 선사가 당시 임제 선사였다면 뭐라고 한마디 하겠느냐고 대답을 다그치셨다.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사가, “30년이나 말을 타고 희롱해 왔더니, 금일 당나귀에서 크게 받힘을 입었습니다.[三十年來弄馬騎 今日却被驢子搏]”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선사의 손을 꼭 잡고, 과연 나의 제자라며 환하게 웃으셨다. 다음날, 향곡 선사는 묘관음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사흘 뒤 1월 16일(음력 1978년 12월 18일)에 게송 한 수를 남기고 열반하셨다.
木人嶺上吹玉笛 목인은 산마루에서 옥피리를 불고 石女溪邊亦作舞 석녀는 시냇가에서 또 춤을 추나니 威音那畔進一步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 歷劫不昧常受用 영원히 미혹하지 말고 항상 수용하라.
되짚어보니, 향곡 선사께서는 본인의 열반을 예견하고 마지막으로 제자의 안목을 확인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성철 선사께서는 향곡 선사의 열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묘관음사로 달려와 애도하고, 장례를 주관하셨다. 다비가 끝나고, 선사는 향곡 선사께서 남긴 법문을 엮어 법어집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절친했던 도반인 성철 선사께 서문(序文)을 청하러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성철 선사는 여러 화두를 거론하여 선사의 안목을 점검하고, 또 칭찬해 주셨다.
· 집필자 : 성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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