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로는 스승이신 향곡 선사의 질문에 대답이 저절로 척척 흘러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향곡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당나라 때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가 열반하기 직전에 편찮으셨다. 어느 날 원주가 아침 문안을 드리며 밤새 존후가 어떠하셨는지를 묻자, 마조 선사께서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라고 답하셨다. 『불명경(佛名經)』에 월면불의 수명은 겨우 하루 낮 하루 밤에 불과하고, 일면불의 수명은 1만 1천겁을 꽉 채운다는 말씀이 나온다. 자네가 답해 보게. 원주가 밤새 편안하셨냐고 물었는데, 마조 선사는 왜 일면불월면불 하고 두 부처님 이름을 부르셨을까?
도무지 입을 뗄 수 없었다. 다시 난관(難關)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마조 선사는 84명의 뛰어난 선지식을 배출하신 분이다. 일면불월면불이라 하신 이 말씀에 마조 선사의 모든 살림살이가 다 들어 있다. 그러니 마조 선사를 바로 알려면 이 법문을 알아야만 한다. 이 일면불월면불 화두는 가장 알기 어려운 고준(高峻)한 법문이다. 『송고백칙(頌古百則)』의 저자로 유명한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 선사도 다른 공안(公案)에는 다 확연명백(廓然明白) 하였지만 이 일면불월면불 공안에는 막혀 버렸다. 그래서 다시 20년을 참구하셨다. 자네도 물러서지 말고 이 화두마저 뚫어야 해.
스승께서 부족하다 하시면 부족한 것이다. 향곡 선사에 대한 믿음이 지극했던 선사는 다시 일면불월면불(日面佛月面佛) 화두를 참구하였다. 1963년(29세) 여름이었다. 여름 안거 해제 즈음에 향곡 선사를 모시고 팔공산 동화사를 방문했다가, 혼자서 묘관음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대구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우연히도 그 기차에서 시자와 나란히 앉아계신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선사를 뵙게 되었다. 금오 선사 역시 동화사를 들렀다 불국사(佛國寺)로 가시는 길이었다.
선사가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리자 금오 선사께서, ‘향곡 선사 회상에서 훌륭한 제자가 나왔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바로 자네로군.’ 하며 반기셨다. 금오 선사께서는 옆자리에 앉으라 권하시고, 견처(見處)를 물어봐도 되겠냐고 하셨다. 인자한 눈빛에 그 음성이 참으로 따뜻했다. 선사가 향곡 선사께 올렸던 게송을 말씀드렸다. 금오 선사께서는 훌륭한 게송이라 칭찬하시고, 선사가 그 게송을 올렸더니 향곡 선사가 뭐라 하셨냐고 물었다. 향곡 선사께서 갑자기 용 잡아먹는 금시조를 만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셨다고 말씀드리자, 금오 선사께서, 어떻게 답했는가를 물으셨다. 선사가, 몸을 움츠리고 당황해서 뒤로 세 걸음 물러나겠다고 말씀드렸다고 하자, 금오 선사께서 크게 웃으셨다. 선사가 금오 선사는 자신의 대답을 어떻게 평하시는지 여쭈었다. 그러자 금오 선사가 어깨를 두드리면서, 용이 살아 있다며 칭찬하셨다. 금오 선사께서는 오래간만에 의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셨는지, 여러 가지 화두를 거론하며 선사에게 묻고 또 물으셨다. 금오 선사의 질문은 기차가 불국사역에 도착하고서야 겨우 끝났다.
1966년, 선사께서 32세 되던 해였다. 일면불월면불 화두와 씨름한 지도 벌써 5년 세월이 흘렀다. 다른 화두에서는 선사들의 의지가 손바닥에 놓인 구슬처럼 확연히 보였다. 그러나 이 화두만 들면 눈앞이 캄캄하고,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빈틈조차 찾을 수 없었다.
새해가 밝고, 겨울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2월(음력 정월)의 어느 날이었다. 남녘의 사찰이라 묘관음사에는 눈이 내리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자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며 잠시 툇마루에 걸터앉았을 때였다. 무던히 던진 눈길에 마당에 놓인 큰 물통이 들어왔다. 산이고 들이고 다른 곳에 내리는 눈은 차곡차곡 쌓이는데, 물통에 내린 눈은 물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순간 홀연히 화두가 박살이 났다. 마침내 고인들이 겹겹이 베풀어놓은 온갖 차별법문(差別法門)을 걸림 없이 회통(會通)한 것이다. 선사께서 오도송을 읊으셨다.
一棒打倒毘盧頂 비로자나불 정수리를 때려 한 방에 쓰러트리고
一喝抹却千萬則 천만 가지 화두도 한 번의 할로 쓸어버리고는
二間茅庵伸脚臥 두 칸 암자에 다리를 펴고 누웠더니
海上淸風萬古新 바다 위 맑은 바람이 만고에 새롭구나.
향곡 선사께 게송을 올렸다. 향곡 선사께서는,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해 받은 육조(六祖)와 마조(馬祖) 그리고 임제(臨濟)의 가풍이 이 게송에 다 담겨 있다고 하며 크게 칭찬하셨다. 그리고 장차 선풍(禪風)을 만방에 드날리라며 격려하셨다.
그렇게 봄이 오고, 여름 안거를 결제하고, 그 안거도 끝이 났다. 해제를 맞아 법당에서 법회가 열렸다. 종이 울리고, 향곡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묵묵히 앉아 계실 때였다. 선사가 앞으로 나가,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아신 것에 대해서는 여쭙지 않겠으니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알지 못한 것을 말씀해달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9·9는 81이다.”라고 답하셨다. 선사가, 그것은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다 아신 것이라고 하자, 향곡 선사께서, “6·6은 36이다.”라고 하셨다. 선사는 아무 말 없이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오늘 해제법문은 이것으로 마친다고 하시고,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다음 날 선사가 가사와 장삼을 갖춰 입고 향곡 선사의 방으로 찾아가,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않겠으니 무엇이 납승(衲僧)의 안목인지 여쭈었다.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다.[師姑元來女人做]”라고 답하셨다. 선사가, 오늘에야 비로소 스님을 친견했다고 하자, 향곡 선사께서,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고 되물으셨다. 이에 선사께서 곧바로 답했다. “관(關)!”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환하게 웃으면서 옳다고 인정하고 칭찬하셨다.
여름이 가고 추석을 닷새 앞둔 날이었다. 향곡 선사께서 은밀히 선사를 방으로 부르셨다. 향곡 선사는 선사에게 진제(眞際)라는 법호와 전법게(傳法偈)를 내리고,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0-1912) 선사-혜월 혜명(慧月慧明, 1861-1937) 선사-운봉 성수(雲峰性粹, 1889-1946) 선사-향곡 혜림(香谷蕙林, 1912-1978) 선사로 이어온 해동(海東)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을 부촉하셨다. 향곡 선사께서 내린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진제 법원 장실에 부치노라
佛祖大活句 부처님과 조사의 살아 있는 진리는
無傳亦無受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
今付活句時 이제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니
收放任自在 거두건 놓건 그대 뜻에 맡기노라.
세존 열반 후 2993년(1966) 8월 10일 운봉 문인 향곡이 설하다.
전법게 향곡-진제
· 집필자 : 성재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