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이신 석우 선사의 열반 일주기를 맞아 1959년(25세) 2월 4일 동화사(桐華寺)에서 추모 법회가 열렸다. 납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가운데 석우 선사를 이어 종정에 추대되신 효봉 학눌(曉峰學訥, 1888-1966) 선사께서 법상에 오르셨다. 효봉 선사께서 주장자를 치고 대중에게 물으셨다. “옛날 보화(普化)는 전신(全身)을 관 속에 벗어던지고 허공에 요령 소리만 남기고 가셨는데, 지금 보화(普化)는 어떻게 열반에 드셨는가?”
동화사 금당선원 (1996년)
옛날 보화는 당나라 때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보화 존자를 두고 하신 말씀이고, 지금 보화는 법명이 보화였던 석우 선사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동화사 금당선원 입승(立繩)을 보던 명허(明虛) 스님이 일어나 벽력같이 할(喝)을 하자, 효봉 선사께서, 그런 쓸데없는 할 함부로 하지 말라며 호통을 치셨다. 명허 스님이, 할을 한 뜻도 모르면서 어찌 부인하시냐고 되받자, 효봉 선사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옛날에 흥화 존장(興化存獎, 830-888) 선사 회상에서 대중들이 동당(東堂)에서도 할을 하고 서당(西堂)에서도 할을 하며 마구잡이로 고함을 쳤다. 그러자 흥화 선사가 상당하여 대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설령 대중이 할을 해서 이 노승(老僧)을 삼십삼천(三十三天)까지 오르게 하고, 노승을 거기서 땅으로 떨어뜨려 기절시켰다가 다시 깨어나게 한다고 해도, 그 할을 옳지 못하다고 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니 공연히 고함치지 말라.
법문을 듣던 대중들이 서로 옳다, 아니다 하면서 소란이 일었다. 그러자 효봉 선사께서, 대중 가운데 다시 대답해 볼 자가 없는지 물으셨다. 그때 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합장하고, 옛날 보화께서도 이렇게 가셨고 지금 보화께서도 이렇게 가셨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효봉 선사께서, 모름지기 답은 저렇게 해야 한다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셨다.
대중이 운집한 자리에서 효봉 선사로부터 칭찬을 들었으니, 기쁨이 한량없었다. 선사는 그렇게 너도 장부요 나도 장부라는 마음을 품고 기세 등등 제방을 다니다가,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에 방부를 들이고 겨울 안거에 들어갔다. 그해 결제에는 훗날 종정을 역임하신 혜암 성관(慧菴性觀, 1920-2001) 선사, 훗날 조계종 원로의원을 역임하신 신광 활안(神光活眼, 1926-2019) 선사, 일타(日陀) 스님의 속가 친형인 월현(月現) 선사 등 쟁쟁한 수좌들이 동참하였다.
오대산 겨울 추위는 매섭고, 선원 살림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큰 방에는 불을 자주 지피지 않아 숭늉을 떠놓으면 곧 얼 정도였고, 이부자리가 없어 잘 때면 정진할 때 쓰던 방석으로 겨우 배만 덮었다. 석 달 내내 소금에 절인 배추김치 하나를 반찬으로 삼았으니, 먹는 것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해 겨울 누린 호사라면, 딱 한 번 온 대중이 울력에 동참하여 콩을 삶고 갈아서 두부를 만들어 먹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대중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악조건 속에서도 서로에게 신심을 일으키고 용기를 북돋을 만큼 참으로 열심히 수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유달리 날씨가 포근하기에 방을 나와 툇마루에 앉아서 따뜻한 햇볕을 쬐다가 곰곰이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가 정말 제대로 깨달은 것일까? 제대로 깨달았다면 어떤 법문이건 막히지 않고, 어떤 질문에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곧바로 답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실상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고개가 숙어졌다. 이런 소견(所見)을 견성(見性)으로 삼고 깨달음으로 삼는다면 도둑을 잘못 알아 자식으로 여기고, 돌덩어리를 황금으로 알아 품속 깊이 간직하는 짓이랑 다를 바 없었다.
선사는 알음알이에 사로잡혀 허송세월한 자신을 깊이 반성하였다. 그리고 붙잡고 있던 소견을 놓아버리고 백지상태로 돌아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리라 다짐하였다. 혼자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런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을 의지해야만 했다. 그래서 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때 향곡 선사가 떠올랐다. 그간 찾아뵌 여러 선지식 가운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견성한 것이 아니라고 단칼에 부정하신 분은 향곡 선사 단 한 분뿐이셨다. 그때 선사는 향곡 선사를 의지해 이 공부를 끝내리라고 결심하였다.
1960년, 선사께서 26세 되던 해였다. 처마까지 쌓였던 오대산 눈이 녹고 해제일이 다가왔다. 선사는 함께 정진했던 수좌 세 분과 함께 바랑을 지고 상원사를 떠나 묘관음사로 향했다. 선사가 스님을 의지해 공부하려고 찾아왔으니 화두를 내려주라고 청하자, 향곡 선사께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며 고개를 돌리셨다. 선사가 화두를 주시면 깨칠 때까지 바랑을 지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자, 향곡 선사께서는 이 어려운 관문(關門)을 뚫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선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목숨을 내놓고 한 번 공부하겠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비로소 향곡 선사께서 화두를 내려주셨다.
나라 때 향엄 지한(香嚴智閑, ?-898) 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대중에게 이렇게 법문하셨다. 천 길 낭떠러지에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입으로 그 가지를 물었다. 발도 디딜 곳이 없고, 손으로 붙잡을 곳도 없다. 그때 마침 어떤 사람이 그 근처를 지나가다 그에게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물었다. 만약 대답하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되고, 대답하지 않으면 또 그 묻는 사람의 뜻에 어긋나게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향곡 선사께서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를 물으셨다. 선사가 말이 없자, 향곡 선사께서 참구하라고 하셨다. 그날 이후로는 결제 해제마저 의미가 없었다. 선사는 산문 출입을 일절 삼가고 오로지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와 씨름하였다. 가건 서건 앉건 눕건 오로지 화두 일념(一念)뿐이었다. 그렇게 근 2년의 세월이 흘렀다.
1961년(27세) 가을 어느 날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법당에 예불을 드리러 가던 길이었다. 캄캄한 도량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얼른 털고 일어나려던 순간, 홀연히 화두가 타파되었다. 동문서답하던 종전의 미혹함이 한순간에 걷히고, 진리의 세계가 활짝 펼쳐졌다. 선사는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향곡 선사께 올렸다.
這箇拄杖幾人會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까?
三世諸佛總不識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들 알지 못했네.
一條拄杖化金龍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빛 용으로 변해
應化無邊任自在 한량없는 조화를 맘대로 부리는구나.
향곡 선사께서 게송을 보시고는, 갑자기 용 잡아먹는 금시조(金翅鳥)를 만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셨다. 선사가 곧바로, 몸을 움츠리고 당황해서 뒤로 세 걸음 물러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 옳다고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다.
· 집필자 : 성재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