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꿈처럼 행복한 나날이었다. 온 산에 꽃향기가 가득한 봄이 가고, 푸른 바다 빛과 솔바람 소리로 더위를 식히던 여름도 지나고, 코끝에 선선한 가을바람이 느껴질 무렵이었다. 여름 3개월의 안거(安居)를 마치던 날, 선방(禪房)을 편력하며 십수 년을 수행해오던 구참(舊參) 선객(禪客) 네 분이 바랑을 짊어지고 해관암으로 찾아왔다. 제방(諸方)에 명망이 자자했던 석우 선사께 인사도 드리고, 그간의 공부를 점검받기 위함이었다. 구참 납자(衲子)들이 인사를 올리고 법문을 청하자, 석우 선사께서 해관암 대중을 모두 불러 모으셨다. 당시 행자였던 선사는 가장 말석인 마루에 앉았다.
남해군 해관암
형형한 눈빛으로 납자들을 묵묵히 바라보던 석우 선사께서 입을 여셨다. 선사께서는 시주의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밝히시고, 시주의 공덕으로 여름 석 달을 편히 지냈으니 오늘 그 밥값을 추심(推尋)하겠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는 옛날 중국에서 시(詩)에 적절한 운자(韻字) 하나를 잘 놓아 과거에 급제하던 고사를 거론하며, 7언시 ‘일출동방대소(日出東方大笑)’ 즉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크게 웃는 모습이 어떠한가?’하는 글귀에 마지막 운자 하나를 놓아보라고 하셨다. 옛날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나 아(我)자를 놓아 재상에 등용되었는데, 지금 그대들은 그 시구 마지막에 어떤 글자를 놓겠느냐는 것이었다.
찾아온 선객들 모두 묵묵부답이었다. 수행을 오래 한 납자부터 차례로 물으셨지만,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석우 선사께서 끝자리에 앉은 선사에게, 네가 ‘일출동방대소’ 다음에 한 글자를 놓아보라고 하셨다. 선사는 곧바로, 저라면 없을 무(無) 자를 놓겠다고 답하였다. 석우 선사께서 무(無) 자를 선택한 까닭을 물으셨다. 그러자 선사는, 해가 동쪽 하늘에 떠올라 밝은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지만 털끝만큼의 차별상(差別相)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크게 웃는다는 뜻에서 무 자를 놓겠다고 답하였다. 이에 석우 선사는 환하게 웃으며, 이 행자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며 칭찬하셨다.
화사한 가을이 가고 겨울 문턱으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해인사(海印寺) 대중들이 석우 선사를 해인사 선원(禪院)의 조실(祖室)로 추대하고 직접 모시러 찾아왔다. 석우 선사께서는 이를 수락하고, 거처를 해인사로 옮기셨다. 선사 역시 석우 선사를 모시고 해인사로 따라갔다. 선사의 행자 생활은 해인사에서도 이어졌다. 해인사는 해관암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살림살이가 컸다. 선사는 타고난 근면함과 명석함으로 사찰의 대소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행하였다.
그해 선사는 해인사에서 석우 선사를 은사(恩師)로 법원(法遠)이라는 법명을 받고, 자운 성우(慈雲盛祐, 1911-1992) 율사를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를 수지하였다. 정식으로 출가 수행자가 된 선사는 해인강원(海印講院)에 입학하여 경전을 수학하셨다. 그 무렵 불교계는 정화불사운동(淨化佛事運動)으로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선사는 안팎의 분란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수행자의 본문만을 갈고닦았다.
1955년(21세) 8월, 대처 측과 갈등을 빚던 비구 측은 전국 승려대회를 열어 단독으로 종단을 구성하고, 첫 중앙종회에서 만장일치로 석우 선사를 종정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석우 선사께서는 고성(固城) 옥천사(玉泉寺) 백련암(白蓮庵)으로 잠시 거처를 옮기셨다.
1956년(22세) 2월 11일(음력 1955년 12월 30일)에 있었던 일이다. 해인사에서는 섣달그믐이면 강원과 선원을 포함한 해인사 모든 대중이 큰 방에 모여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전통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수십 년을 좌선에 매진한 선덕(禪德)은 물론이고, 새로운 종단의 초대 해인사 주지로 부임하신 자운 성우(慈雲盛祐) 율사와 대강백이신 운허 용하(耘虛龍夏, 1892-1980) 종사께서도 함께하셨다. 100여 명이 넘는 대중이 좌정한 가운데 목침 돌리기가 벌어졌다. 목침을 돌리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재미난 법담(法談)을 한 마디씩 하는 승가(僧伽)의 놀이였다.
목침이 돌아가고 자기 차례가 되자 다들 멋들어진 경구(經句)와 시구(詩句)에다 익살스러운 이야기까지 엮어 재미난 이야기 마당을 펼쳐졌다. 그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듣던 선사는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과연 저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저 말의 공덕을 누리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화려한 언설로 부처님과 조사들의 말씀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유창하게 전한다고도 해도 그건 부처님과 조사들의 살림살이지 자신의 살림살이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참된 공부는 반드시 깨달음과 실천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만약 책 속의 글자나 외워 입으로만 부처님 말씀을 늘어놓는다면, 그건 사흘을 쫄쫄 굶은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온갖 요리법을 멋들어지게 설명하며 으스대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고 또 우스꽝스러운 노릇이었다.
한참 이야기 마당이 펼쳐지다가 선사 앞에서 목침이 멈추었다. 선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합장하고, 은사이신 석우 선사께 들었던 고사를 하나 거론하였다. 그 고사는 이랬다.
당나라 때 안목이 밝은 거사가 한 분 계셨다. 하루는 스님 한 분이 그 거사를 찾아왔다. 거사는 푸짐하게 상을 차려 대접하고,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를 물었다. 스님은 눈비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쇠락한 사원의 현황을 알리며 화주를 하러 산에서 내려왔다고 말했다. 스님은 불전에 보시하면 장차 큰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며 거사에게 시주를 권하였다. 그러자 거사가 빙그레 웃었다. 거사는 불법에 대해 궁금하던 것이 하나 있는데 그 궁금증을 풀어주면 정성껏 시주하겠노라 약속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제대로 답을 못하면 그냥 돌아가겠냐고 물었다. 화주를 하러 나선 스님은 평소 여러 경론(經論)을 섭렵하며 열심히 불법을 공부했노라고 자부하던 이였다. 스님은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거사가 붓과 종이를 꺼내 마음 심(心) 자를 쓰고는 스님에게 내보이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스님은 곧바로, 마음 심 자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거사가 자신의 아내를 불러 그 종이를 내보이며, 당신은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음 심 자가 아니냐고 답하였다. 그러자 거사가 웃으면서 아내에게, 당신도 저 스님처럼 화주를 받으러 다닐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결국 그 스님은 한 푼의 시주도 받지 못한 채 쫓기듯 거사의 집을 나와야만 했다.
선사는 이 고사를 거론하고, 그 화주승이 거사의 질문에 어떻게 답했다면 쫓겨나지도 않고 시주까지 두둑이 받을 수 있었을까를 물었다. 100여 명의 대중 스님들이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선사는, 여기도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분이 없다고 말하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말단에 앉은 신출내기 학인이 어른들의 입을 틀어막은 꼴이 된 것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주지이신 자운 스님께서 너털웃음으로 정적을 깨트리며, 저 학인 스님을 조실로 모셔야겠다고 하셨다. 자운 스님의 재치로 큰 방에 한바탕 웃음이 휘몰아치고, 어색한 분위기가 가시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주지 스님께서 선사를 따로 불러, 어른들이 많은 대중 앞에서 벙어리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민망하셨겠냐고 말하며 선사에게 참회(懺悔)를 권하였다. 선사는 곰곰이 돌이켜보았다. 그날의 언행이 이치에 어긋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절집에는 위아래의 질서와 어른들의 권위도 필요한 법이었다. 이에 선사는 한 마디 반론도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주지 스님의 뜻에 따라 선원과 강원을 돌면서 대중에게 참회하였다.
· 집필자 : 성재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