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사(大禪師)의 법호는 진제(眞際), 법명은 법원(法遠), 속성은 임씨(林氏), 속명은 기택(琪澤)이시다. 어머니께서는 하늘에서 밝은 해가 떨어져 치마폭에 안기는 꿈을 꾸고 선사를 잉태하였으며, 1934년 2월 25일(음력 1월 12일)에 경상남도(慶尙南道) 남해군(南海郡) 삼동면(三東面) 금송리(金松里) 금송마을에서 선사를 낳으셨다.
3남 4녀 중 넷째로 성장한 선사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성실하였다. 여섯 살 되던 해 어느 여름날이었다. 마을 어귀에 마을 어른들이 곧잘 모여 소일하던 큰 정자나무가 있었다. 우연히 그 정자나무 근처를 지나는데 이웃 어른들과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아버지께서 손짓해 부르셨다. 그 자리에는 처음 뵙는 선비 한 분이 앉아계셨다. 아버지는 선사의 손을 끌고 선비에게 다가가, 선사의 관상을 보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금송리 금송마을 정자나무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점잖은 선비는 선사의 골상과 안색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으며, 참으로 귀한 아들을 두셨다고 칭찬하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아버지는 두고두고 이날의 일을 되뇌며 선사를 격려하셨다.
남해안 깊숙한 바닷가 어귀에 있는 금송리는 식민지 해방정국의 혼란과 6·25 전쟁의 참상도 비껴갈 만큼 외지고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 덕분에 선사는 소박한 농촌의 일상 속에서 평화롭게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는 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소가 농사일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항상 근면하고 성실했던 선사는 학교에 다녀오면 늘 소를 몰고 뒷산에 올라 꼴을 먹이고, 저녁 무렵이면 지게 가득 땔감을 지고 산에서 내려오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1953년, 선사께서 19세가 되던 해였다. 학업을 마치고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지내던 때였다. 2월(음력 정월)에 고성(固城)에 사시는 오촌 당숙께서 찾아오셨다. 당숙께서는 새해를 맞아 불공도 올리고 고명하신 스님께 인사도 드릴 겸 절에 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였다. 당숙께서는 불쑥, 금강산에서 오랫동안 수행하신 큰 도인(道人)께서 인근에 머물고 계시니 함께 찾아가 법문도 듣고 인사도 드리자고 선사에게 권하셨다.
아마도 숙세(宿世)에 맺은 깊은 인연이 있었나 보다. 선사는 “도인이 계신다.”라는 그 한 마디에 알 수 없는 환희심이 가슴에서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당숙께서는 학덕이 높은 선비셨다. 그런 분이 헛된 말씀을 하실 리가 없었다. 절이라고는 도통 가본 적 없던 선사는 당숙의 한 마디 권유에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선뜻 길을 따라나섰다. 쌀을 한 말 짊어지고 당숙을 따라 10여 리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해관함(海觀庵)이었다.
그곳에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게 밝은 낯빛에 눈빛이 맑은 노스님이 계셨다. 그분은 석우 보화(石友普化, 1875~1958) 선사셨다. 속성(俗姓)이 설씨(薛氏)인 석우 선사께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노장(老莊)은 물론이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까지 두루 섭렵하신 분이었다. 37세 늦은 나이에 『보조어록(普照語錄)』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홀연히 출가한 선사는 금강산 영원암(靈源庵)에서 20여 년을 수행한 분이셨다.
당숙께서는 방으로 들어가 석우 선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셨다. 그리고 마당에 서 있던 선사를 손짓해 부르며, 자네도 들어와 인사 올리라고 권하였다. 선사는 미처 방에 들어서기도 전, 마루에서 덥석 큰절을 올렸다. 그러자 석우 선사께서 가까이 오라 부르시더니, 선사의 기골을 찬찬히 살펴보셨다. 그리고 올해 몇 살이냐고 물으셨다. 선사께서 만으로 열아홉이 됨을 밝히자, 석우 선사께서 대뜸, 세상에서 사는 것도 좋지만 출가해서 스님이 되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첫 대면에 출가 권유를 받은 선사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곧바로 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석우 선사께서는, 범부(凡夫) 중생(衆生)이 위대한 부처님이 되는 법이 있으니 대도(大道)의 진리를 한번 닦아보라고 권하셨다.
범부가 성인(聖人)이 되는 길이 있다는 말씀이 선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선사는 일생의 기로를 결정할 중대사를 쉽게 결단할 수 없었다. 선사는 우선 부모님이 계시니 집에 돌아가 상의해보겠노라 말씀드리고, 결정을 미루었다. 그리고 당숙과 함께 해관암에 며칠 머물면서 스님들의 생활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스님들의 삶은 참으로 맑고 정숙하였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이어지는 고단한 일과에도 누구 하나 짜증내는 사람이 없고, 부드러운 말씨에 공손한 태도까지, 세속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청정하고 평화로운 삶이었다. 스님들의 삶에 환희심이 솟은 선사는 오랜 고민 끝에 수행자의 길을 걷겠노라고 결심하였다.
불공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온 선사는 부모님께 출가할 뜻을 말씀드렸다. 하고 많은 인생길에서 남들은 잘 가지 않는 출가자의 길을 선택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까닭을 물었다. 선사는 석우 선사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며 자신도 위대한 성자가 되어보겠노라는 뜻을 밝혔다.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선사는 그 길로 곧장 해관암으로 달려가 석우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푸른 바다가 펼쳐진 산자락의 작은 암자 해관암에서 행자 생활이 시작되었다. 조용한 산중이라지만 행자의 일상은 늘 바쁘고 분주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예불을 올리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아침 공양을 준비하고, 공양이 끝나면 도량을 청소한 후 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고, 사시가 되면 부처님 전에 마지를 올리고, 또 점심 공양을 준비하고, 오후에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땔감을 마련하고, 저녁 공양과 저녁 예불을 끝낸 후에는 노스님 방에 들어가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편히 앉아 잠시 숨 돌릴 겨를도 없는 생활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점점 맑고 고요해졌다. 당시 불교계에서 “절집 정승은 석우 선사다.”라는 말이 떠돌고 있을 정도로 석우 선사는 명석한 판단력에 온화한 인품까지 겸비한 분이셨다. 실로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고 하였다. 이 두 가지에 더해 훌륭한 스승까지 만났으니 실로 크나큰 복이었다.
일과 중 가장 좋은 행복한 시간은 늦은 밤 석우 선사의 방에 들어가 안마해 드릴 때였다. 발을 씻겨드리고 다리를 주무르는 동안, 석우 선사께서는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으로 불법의 이치를 설명해주고, 고금(古今) 성현들의 일화를 들려주며 자상하게 깨우쳐 주셨다. 그럴 때마다 선사는 샘솟는 환희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대야에 물을 받아 석우 선사의 방으로 들어가서 발을 씻겨드릴 때였다. 석우 선사께서 물끄러미 선사를 바라보다 옛날 고사를 하나 들려주셨다. 그 고사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한 노스님이 시자(侍子)를 데리고 암자에 살았는데, 시자가 저녁마다 옹기에 물을 떠서 노스님의 발을 씻어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자가 발 씻은 물을 버리다가 그만 옹기를 깨버렸다. 시자는 다음날 새벽 부리나케 산을 내려가 장터에서 똑같은 옹기를 사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노스님 발을 씻어드리려고 옹기에 물을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노스님은 발 씻기를 거부하며 대뜸 역정을 내셨다. 이것은 내가 쓰던 옹기가 아니니 내가 쓰던 옹기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시자는 옹기의 모양새가 예전 것과 달라서 노스님이 역정을 내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다음날 새벽 다시 산을 내려가 장터에서 예전의 것과 거의 똑같은 모양의 옹기를 골라서 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새 옹기에 물을 받아 방으로 들어갔는데, 노스님에게서 돌아온 답은 똑같았다. 이것도 내가 쓰던 옹기가 아니니 내가 쓰던 옹기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석우 선사께서는 이 고사를 들려주며, 당시 시자였다면 어떻게 대처하겠느냐고 선사에게 물으셨다. 선사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내가 쓰던 옹기를 가져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자리에서 옹기를 내려쳐 박살냈을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석우 선사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이후 석우 선사께서는 선사를 더욱 총애하셨다.
· 집필자 : 성재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