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등재유산으로 한국불교 의식의 기억을 담고 있는 기록유산으로서 ‘괘불(掛佛)’을 소개한다. 괘불은 조선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불교 의식과 궤적을 함께하며 여러 세기에 걸쳐 전승되어 왔다. 조선 사람들은 부모, 스승, 형제, 자손, 나아가서는 국왕과 왕실의 평안, 그리고 내세의 행복을 염원하면서 거대한 부처님 그림인 괘불을 제작하여 걸어 놓고 법회를 펼쳤다.
1. 괘불, 조선 사람의 발원을 품다.
사찰에 가면 중심 공간인 대웅전 앞에 보통 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돌기둥에는 둥근 구멍이 같은 높이에 뚫려 있다. 이것을 보통 괘불대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명칭은 괘불지주로 괘불대를 고정하는 석조 기둥이다. 즉 괘불을 세워서 고정하기 위한 받침대이다(그림 1).
〈그림 1〉 문경 김룡사 대웅전 앞 괘불지주 ⓒ 김경미, 1997
그렇다면 괘불은 무엇일까? 괘불은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거행하는 의례에서 법당 안에 계신 부처를 모두 볼 수 없으므로, 넓은 마당에 내걸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7~10m 크기로 제작한 대형 불화이다. ‘걸다’라는 의미의 한자 괘(掛)와 ‘부처님’을 뜻하는 한자 불(佛)이 합쳐져 ‘부처를 걸다’, 즉 괘불이 되었다. 괘불은 수륙재(水陸齋), 영산재(靈山齋), 예수재(預修齋)와 같은 큰 법회를 할 때 사용되었고, 이러한 법회는 재의 절차를 기록한 의식집에 따라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의식집은 조선 태조 3년(1394)『수륙의문』21본을 간행하였다는 기록[1] 권근, 「수륙의문발」, 『양촌선생문집』 권22; 강호선(2013), 「조선 태조 4년 국행수륙재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 6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p.210 재인용.에서 보이듯이 조선 초부터 간행되어, 의례가 국가 차원에서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수륙재 전통은 고려에서 비롯되었는데 조선에서는 관음굴(觀音窟), 현암사(見巖寺), 삼화사(三和寺)에서 매년 봄, 가을 개최하였다.[2]『태조실록』 4년(1395) 2월 24일 기사. 조선 태조 4년(1397)에는 서울 진관사(津寬寺)를 수륙재를 전담하는 수륙사(水陸社)로 지정하고[3] 권근, 「진관사수륙사조성기」,『양촌선생문집』 권12.,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개최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의 수륙재 설행 기사 외에도 세종(世宗) 15년(1433) 2월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이 시주·발원하여 한강에서 열린 수륙재, 선조(宣祖) 39년(1606) 6월 창의문(彰義門) 밖에서 열린 수륙재 등이 보인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전기에 수륙재가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전기의 수륙재는 성리학적 예제의 확립에 따라 점차 유교식 의례로 대체되었다. 특히, 제사를 지내줄 이가 없는 무사귀신(無祀鬼神) 또는 무적귀신(無籍鬼神)을 위해 여단(厲壇)을 설치하고, 관아에서 제사를 지내주는 여제(厲祭)가 정착하면서 유사한 성격의 불교 의례인 수륙재는 쇠퇴하게 되었다. 태종 4년(1404) 6월 『홍무예제(洪武禮制)』에 따라 전국에 여단 설치와 함께 ‘여제의(厲祭儀)’를 상정하였고, 단종 1년(1453)에는 수륙재를 대신하여 매년 봄, 가을에 여제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 16년(1485) 황해도 극성에서 『국조오례의』에 따라 여제를 올려 불교 의례가 유교 의례로 대체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4]『태종실록』 4년(1404) 6월 9일, 『세종실록』 22년(1440) 6월 29일, 『단종실록』 1년(1453) 1월 21일, 『성종실록』 16년(1485) 1월 5일자 기사 참조; 이종수(2019), 「조선시대 생전예수재의 설행과 의미」, 『불교학연구』 61, 불교학연구회, p.50 재인용.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국가에서 주관하는 여제가 전란 수습 과정에서 미처 회복되지 못한 가운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수륙재와 영산재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조선후기 승려문집 22개에 수록된 49편의 수륙재 소문은 임진왜란 이후 수륙재가 지속적으로 열렸음을 보여준다.[5]한지희(2009), 「죽암편찬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의 서지적 연구」, 석사학위논문, 중앙대학교대학원, pp.15~23.
〈그림 2〉 양산 통도사 용화전 벽화 범패 부분 ⓒ 김경미, 1998
수륙재와 영산재는 죽은 자의 영혼을 천도하는 불교 의식이다. 의식은 야외에 괘불을 내어 걸고 주변 도량을 장엄하고, 괘불 앞의 불단인 상단에 향(香)·다(茶)·화(花)·과(果)·등(燈)·미(米) 등 육법공양(六法供養)을 놓는다. 그 양쪽에는 중단[왼쪽]인 신중단, 하단[오른쪽]인 영단을 차린다. 재 의식에는 징·바라·요령·범종·삼현·육각·호적·나비춤으로 구성된 범패를 하는 의식승이 자리한다. 이러한 의식 절차는 조선후기 사찰건축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통도사 용화전에 들어서면 화려한 색채로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벽화를 마주하는데, 그중 한 벽화에는(그림 2) ‘나무청정법신비로자나불’·‘나무원만보신노사나불’·‘나무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이라고 하얀 천에 붉은색으로 명호를 적어 삼신불을 청하고, 의식단 앞에서 차를 올리는 관복 차림의 두 사람과 그 주변에 둘러선 법고·징·북 등을 든 의식승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괘불을 걸고 진행하는 의례의 형식을 살펴볼 수 있다. 법회를 할 때, 괘불은 많은 대중의 염원을 담고 법당 밖에 우뚝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발원이 전 국토에 걸쳐 뻗어나간 듯, 120여 점이 넘는 괘불이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2. 괘불의 제작 배경과 현황
〈그림 3〉 나주 죽림사 괘불도, 1622, 삼베 바탕 채색,
세로 514.0cm, 가로 262.0cm, 죽림사 소장 ⓒ 문화재청
가장 오래된 괘불은 임진왜란(1592~98)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1622년에 제작된 「나주 죽림사 괘불도」(그림 3)이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고, 살아남은 삶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처럼 어려운 시절이기에 세상을 떠난 영혼 천도와 살아갈 사람의 안녕은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그 결과 조선 사람의 발원을 담은 괘불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림 4〉 서울 석불사 괘불도 화기 부분, 1932, 면 바탕 채색, 서울 석불사 소장 ⓒ 김경미, 2022
괘불에는 화기라고 하여, 화면 아래 혹은 양옆에 붉은색 칸으로 따로 표시하고 조성 과정을 적은 기록이 있다. 보통 연화질(緣化秩)과 시주질(施主秩)로 구성된다(그림 4). 연화질에는 증명(證明)·화주(化主)·송주(誦呪)·지전(持殿)·공양(供養 또는 供司)·화원(畵員) 등이 기록된다. 증명과 화주는 제작을 감독하고 비용을 담당하는 소임이고, 화원(畵員)은 불화를 그린 작가로 금어(金魚)·편수(片手)·양공(良工)·화사(畵師)·화공(畵工)이라고도 한다. 시주질에는 이름 앞에 직급을 적거나 부부가 시주할 경우는 양주(兩主), 남자는 건명(乾明), 여자는 곤명(坤命)이라 적었다. 발원의 첫머리에는 대부분 주상전하를 비롯한 왕실의 안녕을 빌었는데, 왕실 사람이나 왕실 관계자가 크게 시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 내명부 정5품에 이르는 상궁(尙宮)은 많은 괘불에서 시주·발원자로 참여하였다. 괘불은 이처럼 시주자의 발원 즉, 죽은 자의 영혼 위로와 살아남은 자의 안녕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제작한 종교화의 성격이 뚜렷하다.
괘불은 야외에 걸 때 고정하기 위해 목재로 만든 상축과 하축을 매달고, 신성한 복장 주머니를 그림 윗쪽이나 뒷면에 부착하였다. 괘불을 보관하는 괘불함은 주로 법당 뒤에 보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괘불과 괘불함이 비바람에 쉽게 노출될 우려가 있더라도 무거운 괘불을 마당으로 옮기기 쉽기도 하고, 괘불이 커서 법당 안에 들이기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법당 규모가 큰 일부 사찰에서는 건물 측면에 문을 달고, 불단 뒤에 괘불함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별도의 보관 장소를 마련하여 보존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그림 5, 6).
이처럼 괘불은 사찰 의례가 있을 때 특별한 이운 절차를 통해 넓은 마당에 걸리어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녕을 전하는 신앙의 구현체이고, 오늘날까지 의례 전통이 이어져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는 성물(聖物)이다.
〈그림 5〉 파주 보광사 괘불함, ⓒ 김경미, 2004
〈그림 6〉 상주 용흥사 괘불함 ⓒ 김경미, 2022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권근, 「진관사수륙사조성기」, 『양촌선생문집』 권12.
권근, 「수륙의문발」, 『양촌선생문집』권22.
강호선(2013), 「조선 태조 4년 국행수륙재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6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종수(2019), 「조선시대 생전예수재의 설행과 의미」, 『불교학연구』 61, 불교학연구회.
한지희(2009),「죽암편찬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의 서지적 연구」, 석사학위논문, 중앙대학교대학원.
· 집필자 : 김경미(건국대학교 세계유산연구소 선임연구원)
관련주석
- 주석 1 권근, 「수륙의문발」, 『양촌선생문집』 권22; 강호선(2013), 「조선 태조 4년 국행수륙재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 6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p.210 재인용.
- 주석 2 『태조실록』 4년(1395) 2월 24일 기사.
- 주석 3 권근, 「진관사수륙사조성기」,『양촌선생문집』 권12.
- 주석 4 『태종실록』 4년(1404) 6월 9일, 『세종실록』 22년(1440) 6월 29일, 『단종실록』 1년(1453) 1월 21일, 『성종실록』 16년(1485) 1월 5일자 기사 참조; 이종수(2019), 「조선시대 생전예수재의 설행과 의미」, 『불교학연구』 61, 불교학연구회, p.50 재인용.
- 주석 5 한지희(2009), 「죽암편찬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의 서지적 연구」, 석사학위논문, 중앙대학교대학원, pp.1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