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작시기 | 1933 |
|---|---|
| 수량 | 1 |
| 규격 | 702.0×398.0 |
| 재질 | 면 |
| 관련유물 | 괘불함(1933) 1점 |
| 소재지역 | 경기 화성시 |
화성 용주사 괘불도는 세로 702.0㎝, 가로 398.0㎝의 바탕에 석가모니불, 가섭존자, 아난존자를 그린 삼존도 형식의 야외 의식용 대형 불화이다.
하단 3곳의 붉은색 직사각형 안에 왕실에 대한 축원, 시주자와 발원, 제작과 의식에 참여한 인물, 제작 시기, 봉안 장소 등을 기록한 화기를 남겼다. 상궁 4명이 발기 시주로 참여하여 정조, 고종, 명성황후, 순종, 순명황후 등 돌아가신 왕실 어른들의 영가 천도와 살아계신 대비전하 갑오생 윤씨의 건강과 장수를 발원한다고 적고, 상궁 병자생 윤씨 광명수를 비롯한 시주자 명단을 기록하였다. 시주에는 120명이 넘은 인원이 참여하였는데, 상궁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시주에 참여한 이들은 돌아가신 조부모, 부모, 남편, 사형 등의 영가 천도를 발원하였다. 명단 끝에 이 공덕으로 극락국에 나길 바란다는 회향게를 적고, 자손 번창, 복과 장수 등을 빌었다. 그리고 괘불도 완성을 알리는 조상 법회의 감독을 맡았던 환경 완용(幻鏡浣鎔), 청호 학밀(晴湖學密), 의용 찬섭(懿龍贊燮), 법회를 주관한 백은 치용(洦隱致龍), 경농 성은(鏡儂晟恩) 스님을 기록하였다. 제작은 곽운 경천(廓雲敬天)과 남곡 세섭(南谷世燮) 스님이 담당하였고, 성득(晟淂)과 성봉(晟鳳)은 물감을 만들었다. 괘불도 바탕을 만들기 위한 바느질은 청신녀 3명과 비구니 1명이 담당하였다. 화기 끝에 불은(佛恩) 2960년 계유 4월이라고 적고 다시 소화 8년 5월 26일 시작하여 6월 말일 불사의 성공을 아뢰는 법회를 열고, 선종 대본산 용주사에 봉안하였다고 기록하여, 1933년 제작,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되어 불기와 일본 연호 두 가지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석가세존, 가섭존자, 아난존자라고 쓰고 길이 목척 23척이라고 적어, 존상의 명칭과 크기 등을 알 수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가섭존자, 오른쪽에 아난존자를 배치한 간단한 구성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은 대의, 복견의, 군의 등을 갖춰 입고, 연화 족좌 위에 올라 선 모습이다. 두 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왼손은 가슴 앞에 두고,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렸다. 신체에 비해 머리와 얼굴은 크게 그리고 손발을 작게 그려, 수인(手印)보다 상호(相好)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양옆에 정면을 보고 두 손을 모은 채 선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는 석가모니불을 그리고 남은 좁은 공간에 그려 넣은 것처럼 뻣뻣하고 길쭉하게 표현되었다.
괘불도와 관련된 유물로 길이 431.2㎝, 높이 34.5㎝의 괘불함 1점이 남아 있다. 괘불도와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화기에 기록된 목수 강태식이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 괘불도 보다 이른 시기인 1882년 제작되었지만, 야외 의식에서 괘불도와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도량장엄을 위한 오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16점이 전한다.
참고문헌
『한국의 불화』29 용주사 본말사편(하), 문화재청, (사)성보문화재연구원, 2003.
『한국의 사찰문화재』전국사찰문화재 일제조사 인천광역시, 경기도, 문화재청, (재)불교문화재연구소, 2012.
송천, 이종수, 허상호, 김정민(2011), 『한국의 불화 화기집』, 도서출판 성보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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