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표기 | 靈山會掛佛 |
|---|---|
| 지정명칭 | 예천 용문사 영산회괘불탱 |
| 제작시기 | 1705 |
| 중수시기 | 2008 |
| 수량 | 1 |
| 규격 | 1,084.5×674.3 |
| 재질 | 삼베 |
| 관련유물 | 괘불함(조선후기) 1점 |
| 소재지역 | 경북 예천군 |
예천 용문사 괘불도는 세로 1,084.5㎝, 가로 674.3㎝의 바탕에 석가모니불의 영산회 장면을 그린 오존도 형식의 야외 의식용 대형 불화이다.
하단 2곳에 왕실에 대한 축원, 제작 시기, 봉안 장소, 시주와 제작에 참여한 인물 등을 기록한 화기를 남겼다. 성상전하, 왕비전하, 세자저하의 장수를 축원하고, 강희 44년 을유(1705) 4월 영산회 괘불 한 부를 그려, 경상좌도 예천군 북면 용문산 창기사에 봉안한다고 기록하였다. 성상은 당시 왕이었던 조선 숙종이고, 창기사는 지금 용문사의 조선시대 별칭이다. 공양, 후배 등의 항목에 시주한 인물을 기록한 뒤, 이 절의 삼강, 노덕, 산중대덕을 적고 연화질을 기록하였다. 연화질에는 증명, 지향, 화원, 취공, 부목, 별좌, 화주 등 제작과 의식에 직접 역할을 담당한 인물을 기록하였다. 화기에 기록된 인물은 총 108명이다. 감독은 도모(道母) 스님, 의식은 진오(進悟) 스님이 맡았다. 제작은 수화원 성징(性澄)을 비롯하여 신정(愼淨), 효안(效安), 석기(釋機), 원인(圓認), 심일(心日), 쌍회(双會), 화승 7명이 담당하였다. 성징은 1702년 성주 선석사 괘불도를 제작할 때는 수화승 탁휘(卓輝) 아래의 동참 화승이었다. 제일 끝에 별도로 기록된 바탕 대시주 겸 대화주 청풍납자 광섭(廣攝)은 불사에 필요한 제반 경비를 모아오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괘불도와 관련된 기록으로 예천 한천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1939년의 동아일보 기사, 순국열사들과 태평양 전쟁에서 전몰한 징병에 대한 합동 위령제를 지냈는데 많은 군민이 참여하였다는 1949년의 영남일보 기사가 확인된다. 기사에 어느 절의 괘불도를 걸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용문사 괘불도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로 구성된 삼존을 크게 부각하여 그리고, 위쪽에 가섭존자, 아난존자를 배치한 구도이다. 석가모니불은 양어깨를 가린 변형된 편단우견 형식의 법의를 걸치고, 오른손을 어깨 위까지 들어 연꽃가지를 잡았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가슴 앞에 두었다. 머리의 나발은 윤곽선으로 묘사하고, 뾰족하고 우뚝 솟은 모양의 육계에 정상계주와 중앙계주를 표현하였다.
괘불도와 관련된 유물로 괘불함 1점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길이 729.0㎝, 높이 40.8㎝의 목제 상자형 궤이다.
참고문헌
『2005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상권(건조물문화재분과·동산문화재분과)], 문화재청, 2006.
송천, 이종수, 허상호, 김정민(2011), 『한국의 불화 화기집』, 도서출판 성보문화재연구원.
『대형불화 정밀조사 보고서』33 보물 제1445호 예천 용문사 영산회 괘불탱, 문화재청, (사)성보문화재연구원, 2020.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문화유산 검색, ‘보물 예천 용문사 영산회 괘불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