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이 이뤄졌어도 백성들에게 4월초파일 연등회는 변함없는 축제였다. 오랜 역사 동안 이어온 민족 고유의 세시풍속이자 명절이기 때문이다. 옛 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해 일제 강점기의 연등회를 살펴보기로 하자.
1913년 4월초파일에는 ‘경성사람이 거반 다 나온 듯’ 길에 ‘사람들이 끔찍이 많이’ 나왔다고 했다. 1923년 4월초파일 기사에는 ‘아침부터 시내의 남녀노유는 별러서 노는 날이요, 더욱이 불교의 감회가 널리 미쳐있는 우리의 기념에서는 매우 소중히 여기는 날’이라고 했다. 종교를 떠나서 온 백성이 즐기는 민족의 명절임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종로통 상인들은 1925년 4월초파일에 ‘전 시가지를 전기로 장식’해 ‘매일 밤 사람의 물결과 전광의 물결로 대성황’이었으며 ‘삼십만 부민이 통틀어 쏟아져 나온 듯’ 인산인해를 이뤘다. 1928년에는 종로통에 40여 년 만에 다시 거대한 등대가 세워졌다. ‘멀리 황해도 방면을 위시하여 개성, 인천, 수원 등 먼 곳에서’ 구경을 오는 통에 ‘경성역에는 대혼잡’이 일었다. 저녁에 남산에서 관등놀이를 즐기려는 인파가 남대문 일대에만 10만여 명에 달해 교통이 일시 막히고 ‘종로서에서는 비번 순사 백 수십 명을 소집’해서 교통 정리를 시켰다.
〈그림 1〉 민속학자 석남 송석하(1904-1948)가 수집한 개성 사월초파일 광경 ⓒ국립민속박물관
이 무렵의 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파일빔’이다. 설날 새 옷을 장만하는 것을 설빔이라 하듯이 4월초파일에 입는 새 옷을 파일빔이라 했다.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모두 정성스럽게 파일빔을 챙겨 입었으며 아이들이 모시 한복을 입고 장난감을 한아름 안고 거리를 누볐다. 어린이날이 제정되기 전까지 연등회는 어린이날이었다.
〈그림 2〉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의 『Old Korea』(1919)에 수록된 4월초파일에 색동옷을 입은 아이 ⓒ가나문화재단
여성들의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아이와 부인이 차지한 사월초파일’이라는 기사가 나올 만큼 여성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명산대찰을 참배하는 ‘초파일 관등단’을 모집할 정도로 연등회는 여성의 날이기도 했다.
또한 경성에서만 펼쳐진 것이 아니라 전역에서 연등회가 열렸다. 그 가운데 조선 최고의 연등회 지역을 개성으로 꼽고, 4월초파일의 명절다움을 보려면 ‘개성이 제일’이라고 했다. 고려의 옛 도읍지 개성의 연등회는 특별히 ‘파일놀이’라고 불렀다. 개성 상인들은 연등회 인파의 눈길을 끌기 위해 ‘전기등을 가설해서 등대를 세우고’ 대폭 할인행사를 주도했다. 개성 시가지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등을 많이 달고 가가마다 등대를’ 세우는 풍습이 이어졌으며 ‘으리으리하고 곱고 구경할 것이 많은 까닭에’ ‘시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림 3〉 개성과 남원에서 열린 연등회 행사 모습 ⓒ조선중앙일보(1936.05.31.)
조선총독부는 1936년에 음력을 없애고 양력을 통일하는 방안을 발표한다. 1937년 4월초파일부터 총독부 방침에 따라 불교단체의 기념행사는 양력 4월 8일에 열렸다. 일본의 침략 야욕이 가장 극명하던 1940년대에는 간략한 형태의 초파일 행사만 열렸다. 그러나 백성들의 경우는 달랐다. 음력 4월초파일이면 어김없이 집집마다 작은 연등을 밝히고 절을 찾아 등을 달며 기원했다. 곱게 파일빔을 챙겨 입었으며 등에 불을 밝히고 관등놀이를 즐기며 긴 세월 이어진 민족의 명절을 기렸다. 나라를 잃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연등회는 여전히 조선의 전통을 찾아 즐기며 조국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 집필자 : 이윤수((사)문화예술콘텐츠진흥원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