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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지켜온 조선의 연등회

1392년 개국한 조선은 유학을 치국의 철학으로 삼았다. 숭유억불 정책 아래 불교는 위축되었고 고려문화의 청산이라는 과제 속에 국가 의례 연등회는 철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500년 넘는 역사 동안 백성들 사이에 뿌리 깊게 남아있던 민족의 명절 연등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개국 직후부터 도당(都堂)과 유생들이 연등회 폐지와 정지를 간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궁궐에서조차 연등회는 화려하게 펼쳐졌다. 연등회를 준비한 부서는 내자시(內資寺)와 내섬시(內贍寺)였다. 태종은 1412년(태종 12)에 궐 안의 연등 설치를 반대하는 신하에게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연등을 폐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단 등을 만들 때 지나치게 예산을 허비하지 말라는 당부를 내렸다. 태종은 정월대보름과 4월초파일에 궐 안에 수백 개의 등을 달고, 연등 구경을 했다. 대보름연등회 때 사용한 등은 4월초파일에 재활용해서 썼다. 『태종실록』은 호랑이와 표범, 봉황과 같은 등 500여 개를 만들어 달았다고 전한다. 왕은 관등놀이를 즐긴 뒤, 등을 만든 장인 26명에게 쌀 한 석씩을 내려 공을 치하하기도 했다. 1431년(세종 13) 세종은 연등회를 금하자는 신하의 상소에 ‘예전에도 있어 온 풍속을 어찌 없애기에 급급할 것인가’라고 답했다. 면면히 이어져 온 세시풍속은 하루아침에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실록에 4월초파일 연등회를 등석(燈夕), 관등일 등으로 칭하고 있다. 1635년(인조 13)에 대신들이 왕에게 4월초파일 저녁에 오색비단으로 만든 등불 수백 개를 줄지어 걸어놓고 즐겼다던데, 사실인가를 여쭐 만큼 왕은 궁궐에서 연등회를 즐겼다. 궁궐 연등회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은 『계방일기』에 전한다. 세자 시절의 정조가 스승 홍대용과 4월초파일에 궁궐에 걸린 등에 관해 나누는 대화다. 옥등, 양각등, 비단등, 유리등, 진주등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등이 등장한다.[1]1789년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1782~1786)의 신주 봉안 행렬을 그린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에 백(白)‧청(靑)‧홍(紅)‧흑(黑)의 사초롱[紗燭籠] 등(燈)이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편(2011),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pp.178-181. 숭유억불을 앞세웠어도, 무수한 대신들의 상소와 반대가 있었어도 조선왕조를 통틀어 궁궐에서의 연등회는 꾸준히 열려왔다. 세종의 이야기처럼 오래된 풍속은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1〉 『진연의궤(進宴儀軌)』에 수록된 유리등과 양각등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고려말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4월초파일 연등회는 백성들의 성대한 축제일로 변모했다. 네온사인도 없던 시절 불야성을 이루는 연등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밤거리로 몰려들었다. 백성들 사이에서 연등회날 관등놀이를 만끽할 핫플레이스가 선정되기도 했다. 종가관등(鐘街觀燈)은 대표적인 상업공간이던 종로통 가게에서 밤마다 밝혀놓은 등의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자하관등(紫霞觀燈)은 자하문에서 바라보는 연등회 풍광의 빼어남이고, 척헌관등(陟巘觀燈)은 남산 언덕에 올라 즐기는 연등놀이를 가리킨다. 사대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 관등놀이는 시골 어르신들의 버킷리스트였다. 최고 절경을 보여드리기 위해 몸 아픈 부모님을 업고 남산을 오르는 효자들의 이야기가 전할 만큼 남산의 관등놀이 인기는 대단했다. 이들 명소에서 무수한 유학자들이 자신이 지켜본 연등의 아름다움과 연등회의 즐거움을 시편으로 남겼다. 1763년 선비 이종악이 남긴 〈반구관등(伴鳩觀燈)〉이란 멋진 그림도 당대 연등회를 기록하고 있다. 안동 반구정에서 바라본 안동 풍경에는 강건너 민가에 켜진 연등이 점점이 붉은색으로 찍혀있다. 유교의 메카 안동에서 4월초파일 연등회를 즐기며 집집마다 등을 걸었음을 볼 수 있다. 등불로 밤을 대낮처럼 밝히면서 조선의 백성들은 4월초파일 연등회를 한껏 즐겼다. 꽃들이 만발하는 시기, 잠시 농삿일을 내려놓고 하루 즐길 수 있었던 연등회는 전국 각지에서 만백성이 향유 하던 대표 명절이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행렬문화가 있었다. 왕이 친히 농사를 짓거나 선조의 능을 참배하는 등 왕이 궁을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행렬에는 중간중간 다양한 연희가 펼쳐지곤 했다. 조선왕조의 행사를 그린 의궤를 통해 고려시대 연등회의 행렬을 헤아려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불교계에서 있었던 가장 큰 행렬은 고려대장경판의 이운이었다. 강화도 선원사의 경판을 합천 해인사 장경각에 봉안하기 전에 한양의 지천사에 모셨다. 태조는 친히 용산강에 나아가 경판을 맞았다. 2천 명의 군사가 동원되어 대장경 목판을 운반하였는데 이때 앞에서 승려들이 경을 외웠고 의장대가 연주하는 장엄한 행렬이었다. 세조 때에는 고려의 풍습이었던 전경법(轉經法)이 행해졌다. 고려 때 경전을 모시고 거리행렬을 했다면 조선에서는 가마에 작은 불상을 모시고 길을 나섰다. 악대를 앞세운 뒤 승려 수백 명이 좌우로 나뉘어 향을 들고 경을 외우고 범패를 하며 행렬을 했다. 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물밀듯이 모여들었다. 반면 고려 연등회 행렬의 일면은 조선시대 탈놀이 가운데 동래야류와 수영야류[2]동래야류(東萊野遊)와 수영야류(水營野遊)는 부산의 동래와 수영지역에서 세시민속놀이로 펼쳐지던 가면극이다. 너른 들판에서 열린다고 해서 들놀음, 즉 야류라고 불렀다. 길놀이를 통해 인파를 모으고, 밤이 되면 등불을 달고 가면극을 펼쳤다.의 길놀이에서 찾아진다. 이들 야류의 길놀이에는 대규모 연등 행렬이 있다. 정월대보름날 길놀이 팀들이 달 뜨는 시각에 놀이판을 향해 출발한다. 맨 앞에 길을 밝히는 소등대(小燈隊)가 선다. 긴 새끼줄 마디에 작은 등간을 끼우고 그곳에 200여 개의 등을 달아서 수십 명의 마을 소년들이 그 새끼줄을 들고 행진한다. 뒤이어 거대하고 화려하게 만든 용등, 봉황등, 거북등, 연꽃등을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어깨에 메고 행렬에 참여한다. 이를 연등대(燃燈隊)라 부른다. 오늘날의 장엄등 행렬과 유사하다. 연등 행렬은 한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날, 거리행렬을 하면서 공연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행렬이 놀이판에 도착하면 소등대는 세워둔 장대와 장대 사이에 새끼줄을 매어 달아 조명등으로 활용했다. 대형등은 그 장대 꼭대기에 매달았다. 등불을 대낮처럼 밝혀놓은 놀이판에서 시대를 풍자하는 탈놀이가 신명나게 펼쳐진 것이다. 화려할 때는 초롱에 색을 칠한 오색등이 500여 개에 달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낮 시간대, 혹은 실내에서 공연되면서 길놀이의 의미가 퇴색되고 소멸되는 형편이다.
· 집필자 : 이윤수((사)문화예술콘텐츠진흥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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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1 1789년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1782~1786)의 신주 봉안 행렬을 그린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에 백(白)‧청(靑)‧홍(紅)‧흑(黑)의 사초롱[紗燭籠] 등(燈)이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편(2011),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pp.178-181.
  • 주석 2 동래야류(東萊野遊)와 수영야류(水營野遊)는 부산의 동래와 수영지역에서 세시민속놀이로 펼쳐지던 가면극이다. 너른 들판에서 열린다고 해서 들놀음, 즉 야류라고 불렀다. 길놀이를 통해 인파를 모으고, 밤이 되면 등불을 달고 가면극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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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연의궤(進宴儀軌)』에 수록된 유리등과 양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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