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중행사였던 보름연등회
부처의 도움으로 고려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뤘다고 굳게 믿었던 태조(太祖)는 후손들에게 모범으로 삼아야 할 10가지 조항을 훈요십조(訓要十條)로 남긴다. 이 가운데 여섯 번째 항목으로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왕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굳게 맹세’한 만큼 반드시 연등회를 존중해서 시행하라 강조했다. 고려의 왕들은 태조의 뜻을 받들어 국중행사로 연등회를 설행(設行)하였다.
1010년에 현종은 정월대보름 연등회를 폐지한 뒤 부처님의 열반절인 2월보름으로 옮긴다. 이후로도 2월에 국상을 당하면 정월대보름 연등회가 열렸다가 이듬해 다시 2월보름으로 옮겨지곤 했다. 연등회의 체계적인 운영은 연등도감(燃燈都監)이란 부서에서 주관하였다.
연등회는 이틀에 걸쳐 열렸다. 연등회는 통금이 해제되는 국가 명절이었다. 14일 소회일에는 궁궐에서 신하들이 왕에게 인사하는 의례를 행한 뒤 공연과 춤과 연주가 이어졌다. 소회의례를 마친 뒤 왕은 봉은사(奉恩寺)[1]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었던 951년(광종 2)에 고려 제1대 태조의 원당(願堂)으로 창건한 국찰이다. 1038년(정종 4)에 정종이 연등회 저녁에 봉은사에 가서 태조 진영(眞影)에 분향한 이후로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를 올렸던 사찰이다. 조선시대 들어 점차 퇴락한 이후에는 폐사지조차 확인된 바가 없다.로 행차한다. 봉은사에는 태조 진영이 모셔져 있었다. 봉은사로 오가는 길목에는 수많은 가설물과 연등이 설치되고, 대규모 거리공연이 펼쳐졌다.
고려 문신 최자(崔滋)는 『보한집』에서 2월보름 연등회 전야제를 두고 ‘수많은 등불이 하늘까지 이어져 밝음이 마치 대낮과 같았다’고 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2월보름 연등회 풍경이 다음과 같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부처를 좋아하여 2월 보름에는 모든 절에서 등불을 켜는데 지극히 번화하고 사치스럽다. 모두 나와 왕과 왕비를 구경하고 백성들은 거리를 시끄럽게 메운다.
〈그림 1〉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7 사우(祠宇) ⓒ국사편찬위원회
밝혀놓은 각양각색의 연등이 몹시 화려했던 것 같다. 왕과 왕비가 봉은사로 향하는 길고 긴 행렬을 보기 위해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고려사』에 따르면 전야제 행렬에는 최소 2천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참여하고 있다. 왕을 보필하는 군사들이 화려한 깃발과 병기를 들고 줄지어 가는 장엄한 행렬이었다. 연등회 거리 축제의 맨 뒤에는 고려의 공연단 외에 서역 여러 나라의 공연단이 뒤따랐다.
대회일인 15일에는 왕이 신하에게 차와 술과 음식을 나누는 대연회 의례가 행해졌다. 이날도 다양한 연희와 가무가 펼쳐졌다. 밤에는 등석연(燈夕宴)이 마련되었다. 밤을 화려하게 수놓은 연등 아래에서 군신이 어우러져 술잔을 기울이고 기악백희를 관람하고, 왕이 시를 짓고 이에 신하가 화답의 시를 지으며 연회를 즐겼다. 국중 행사로서 연등회는 연등의 아름다움을 배경 삼아 왕과 신하가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자리였다. 또한 연등의 장관과 장엄한 행렬을 지켜보며 백성들이 힐링하던 축제다운 축제였다.
고려말에 뿌리내린 4월초파일 연등회
고려의 대몽항쟁이 끝난 1259년(고종 46)부터 반원운동이 일어난 1356년(공민왕 5) 사이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원나라의 간섭 아래 고려의 자주성이 상실되었고, 고려가 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서 국중 행사였던 보름 연등회 역시 그 위상이 축소되었다. 반면에 4월초파일 연등회가 보름 연등회를 대신하기에 이른다.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의 첫 4월초파일 연등행사 기록은 1166년(의종 20)에 등장한다. 환관 백선연이 부처님오신날 별원에서 등에 불을 밝히고 복을 빌었으며 왕이 미복잠행 중에 이를 관람했다고 한다. 왕도 관람할 만큼 볼거리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림 2〉 『고려사』 권122, 열전 권제35 환자(宦者) 백선연
ⓒ서울대학교 규장각
고려를 건국한 태조를 중심으로 하는 국중행사 연등회와 달리 4월초파일 연등회는 무신정권이 주도하면서 새롭게 자리잡게 된다.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이는 1245년(고종 32)에 거대한 연등회를 열었다.
최이가 연등 하면서 채붕을 엮고 기악백희를 베풀어 밤새도록 즐기니 도성의 남녀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이날 연등회는 보는 이의 눈이 어지러울 만큼 화려했으며 무려 1,350여 명이 참여한 기악백희의 연주는 천지를 진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4월초파일에 이러한 연등회가 자주 열렸다. 『고려사』에 따르면 1366년(공민왕 15)에는 권력자 신돈이 거대한 연등회를 마련했는데‘개경 사람들이 모두 본떠 따라 했고 가난한 가정에서도 구걸하여 연등을 했다’고 전한다. 등 숫자가 무려 ‘100만이 될 듯’ 많았으며 그 모양이 ‘지극히 뛰어나고 공교’했다고 한다.
최이의 연등회로부터 100여 년이 더 지난 시점의 4월초파일 연등회는 이미 성안 사람들에게 풍속이 되었다. 고려 공민왕대에 이르면 4월초파일은 보름 연등회때처럼 나라 안 온 백성들의 축제일이 되어 있다. 정월대보름 연등회를 대신해 4월초파일 연등회는 백성들이 손수 등을 만들고 등대 높이 등을 걸고 등불을 밝혀놓은 뒤 높은 곳에 올라 관등을 즐기면서 하루 농삿일을 쉬는 민족적 명절로 변화한다.
· 집필자 : 이윤수((사)문화예술콘텐츠진흥원 전문위원)
관련주석
- 주석 1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었던 951년(광종 2)에 고려 제1대 태조의 원당(願堂)으로 창건한 국찰이다. 1038년(정종 4)에 정종이 연등회 저녁에 봉은사에 가서 태조 진영(眞影)에 분향한 이후로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를 올렸던 사찰이다. 조선시대 들어 점차 퇴락한 이후에는 폐사지조차 확인된 바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