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 경한(白雲景閑, 1298~1374)의 생애를 알 수 있는 행장이나 비문이 전하지 않아 그의 문도(門徒)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직지』간행본에 기록된 ‘연화질(緣化秩)’과 ‘시주질(施主秩)’[1]‘연화(緣化)’란 인연이 있는 사람을 인도하고 교화한다는 뜻으로, 불사(佛事)의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불사에 돈이나 물건을 기부하게 하여 공덕을 쌓아 좋은 인연을 맺게 한다는 ‘모연(募緣)’과도 유사하다. ‘시주(施主)’는 불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시주하여 연화를 돕는다는 의미에서 ‘조연(助緣)’과 유사하다. 불사에서 이들의 명단을 각각 ‘연화질(緣化秩)’과 ‘시주질(施主秩)’로 구분해서 부른다.에서 백운 화상의 제자와 후원자를 찾아볼 수 있다. 1377년 흥덕사에서 『직지』를 금속활자로 간행할 당시 실무를 담당했던 인물은 백운 화상의 문인(門人)인 석찬(釋璨)과 달잠(達湛) 그리고 시주에 비구니 묘덕(妙德) 세 사람이 전부였다.(그림 1)
〈그림 1〉 『직지』 금속활자본(1377)의 연화질 및 시주질
1378년 취암사에서는 『직지』와 『백운화상어록』 (이하 『어록』으로 약칭)을 목판으로 함께 간행했기에 흥덕사 때보다는 더 많은 인원이 참여했다. 『직지』에는 17명이,(그림 2) 『어록』에는 8명이(그림 3) 동참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 『직지』의 경우는 금속활자본을 그대로 번각한 것이 아니라 원고를 새로 쓴 판하본(板下本)을 목판에 붙여서 새긴 것이기에, 글씨를 쓴 서원(書員)과 글자를 새긴 각수(刻手, 刻字)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일암(弌菴), 선화(禪和), 천긍(天亘) 세 사람이 서원으로, 종탁(宗倝), 참여(旵如), 신명(信明)이 각수로 참여했다. 『어록』 간행에는 『직지』에 참여했던 종탁 등 세 사람 모두 다시 참여했지만, 서원은 박총(朴叢)이 참여했다.
〈그림 2〉 『직지』 목판본(1378)의 연화질 및 시주질
취암사에서 간행을 기획하고 시주자를 모은 모연(募緣)으로 『직지』에는 법린, 자명(自明), 혜전(惠全), 『어록』에는 법린만 참여했다. 서문에도 나오듯이 법린이 취암사 불사의 주요 책임자였다. 시주 등 재정적으로 도움을 준 조연(助緣)으로 『직지』에는 비구니 묘덕과 묘성(妙性), 영조(靈照), 성공(性空) 그리고 재가자인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 윤씨(尹氏),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 구성군부인(駒城郡夫人) 이씨(李氏), 정순대부판통례문사(正順大夫判通禮門事) 김계생 등 8명이, 『어록』에는 앞에 참여한 8명 중 비구니 묘덕과 북원군부인 원씨, 구성군부인 이씨, 김계생 4명만 참여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백운의 문도와 후원자를 구분해서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그림 3〉 『백운화상어록』 목판본(1378)의 연화질 및 시주질
1. 백운 화상의 문인
1) 석찬(釋璨)
석찬은 백운 화상을 직접 모신 시자로 『어록』을 편찬하였다. 1377년에 『직지』와 『어록』을 목판으로 간행하고자 했으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를 먼저 간행했으며 이때 연화로 참여했다. 당시 활자의 조판이나 교정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2) 달잠(達湛)
달잠은 『직지』의 금속활자 간행 당시 연화로 참여했고, 석찬과 함께 『어록』을 간행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다른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3) 법린(法隣)
법린은 백운 화상이 쓴 『직지』 발문에 직접 언급된 인물이다. 1372년 백운 화상이 『직지』를 2권으로 증보할 당시 법어를 찾는 일을 도왔을 만큼, 백운 화상의 편찬 의도와 『직지』의 내용을 잘 알고 있던 인물로 보인다.
1374년 백운 화상이 취암사에서 입적하자 법린 정혜(靜慧)[2]이색의 서문에 기록된 ‘법린 정혜(靜慧)’를 대부분 두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정혜를 수선사 제14세 법주인 정혜(淨慧)국사 복암(復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문에 나오는 법린 등 『직지』 간행에 참여한 인물들이 모두 연화질에 기록되어 있는 반면 정혜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볼 때 법린의 법명이 정혜일 가능성도 있다.는 『직지』를 목판에 새기고자 불사를 진행할 모연으로 참여했다. 1378년에 『직지』와 『어록』을 목판으로 함께 간행할 때는 당대 기문을 잘 짓는 이색에게 찾아가 책의 서문을 직접 부탁하기도 했다. 취암사 간행 당시 원문 교정이나 판각을 직접 감독했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4) 묘덕(妙德)
묘덕은 1377년 7월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를 간행할 때와 이듬해인 1378년 6월 취암사에서 『직지』와 『어록』을 목판으로 간행할 때 모두 후원한 비구니였다. 14세기 사료에서 ‘묘덕’이라는 법명이 다수 확인된다.
① 『묘덕계첩』
: 1326년(충숙왕 13) 출가 전 묘덕, 지공으로부터 무생계법을 받다
지공(指空, 1300?~1363) 화상은 인도 마가다국 왕자 출신의 고승으로, 1326년(충숙왕 13) 3월에 원나라에서 고려로 건너왔다. 1328년 10월경까지 약 2년 7개월 동안 고려에 머물며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력은 상당히 컸다. 개경에 도착한 20일 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로 옮겨갔던 지공은 충선왕(1275~1325)의 제6왕비인 순비(順妃)의 요청으로 개경 동쪽에 있던 숭수사(崇壽寺)에 머물렀다. 그는 문도와 고승들의 요청으로 최상승무생계법(最上乘無生戒法)에 따라 국왕의 종실과 인척, 공경대부 등 많은 사람들에게 신분과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계를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사료가 『감지금은니문수최상승무생계법(紺紙金銀泥文殊最上乘無生戒法)』이다. 현재 3점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계첩이 지공 화상이 고려로 온 지 2개월 만인 1326년 5월에 내린 계첩으로, 그 계첩을 받은 인물이 바로 재가 여성 신도를 뜻하는 우바이(優婆夷) ‘묘덕(妙德)’이었다.(그림 4) 같은 해 8월에 ‘각경(覺慶)’이, 이듬해인 1327년(공민왕 14) 2월에 ‘나옹’이 계첩을 받았다.[3]지금까지 알려진 『문수최상승무생계첩』 3점 중 나옹 왕사가 수지한 『나옹계첩』은 금강산 유점사에서(조선총독부, 『조선고적도보』 제7권, 圖3248-3249), 『각경계첩』은 해인사 금동비로자나불 복장에서, 『묘덕계첩』(2016년 3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은 개인소장 자료에서 확인되었다.
〈그림 4〉 『묘덕계첩』 (개인소장, 문화재청 제공)
② 비구니 묘덕
1326년에 지공 화상으로부터 계를 받은 묘덕은 50여 년이 지난 1370년대에 다시 자취를 드러낸다. 백운과 지공, 나옹 관련 불사에 시주자로 동참한 것이다. 그때는 재가 여성 신도인 우바이가 아니고 정식으로 출가한 비구니 신분이었다. 다음의 불사 기록에서 확인된다.
- 1377년(우왕 3) 7월, 청주 흥덕사 『직지』 금속활자 간행에 시주하다
- 1378년(우왕 4) 6월, 여주 취암사 『직지』 목판 간행에 시주하다
- 같은 해 7월, 여주 취암사 『백운화상어록』 목판 간행에 시주하다
- 같은 해 8월, 지평현(砥平縣) 미지산(彌智山) 윤필암(潤筆庵) 중건에 시주하다
- 1379년(우왕 5), 여주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驪州神勒寺普濟尊者石鍾碑) 음기에 비구니 24명 가운데 정업원(淨業院) 주지(住持) 묘봉(妙峰)에 이어 두 번째로 새겨지다
이처럼 묘덕은 1377년부터 1379년까지 백운과 나옹과 관련된 불사에 적극 참여했다. 비구니 묘덕에 대해서는 당시 이색이 쓴 「지평현미지산윤필암기」에 언급되어 있다. 묘덕의 출가 전 신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색은 1378년 양평 용문산에 윤필암이 세워지게 된 계기를 ‘(나옹의 문도인) 지선(志先)과 지수(志守)가 열심히 뛰어다닌 공인 동시에, 지금은 묘덕이란 이름의 비구니가 된 정안군부인(定安君夫人) 임씨(任氏)가 재물을 희사한 덕분이다.’라고 했다. 묘덕은 출가 전 정안군의 부인이자 임씨 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③ 정안군부인(定安君夫人) 임씨
: 정안군 허종(許悰)의 부인인가? 정안(장흥) 임씨인가?
고려 시대 정안군으로 봉작을 받은 인물로는 허종(1286?~1345)[4]정안군으로 봉작을 받은 인물로는 허종 이외에도 익흥군 왕련(王璉)의 후손인 왕신(王愼)의 아들인 정안군 왕시(王諟)도 있다. 『고려사』 권91, 「열전」 제4, 종실(宗室) 참고.이 있다. 묘덕이 출가하기 전 고려 왕실과 종실의 외척이었던 허종과 결혼한 인물이었을 경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왕실의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정안군 허종의 넷째 고모가 지공 선사를 지원했던 충선왕의 제6왕비인 순비였고, 정안군의 외조부인 염승익(廉承益)도 집안에서 사경할 수 있는 사경소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정안군 허종의 부인은 충선왕의 외동딸인 수춘옹주(壽春翁主, ?~1345)이며, 1345년 정월에 수춘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이 지나쳐 병이 되어 27일이 지나 허종도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가 60세였다.’라는 사료 기록으로 볼 때 묘덕을 허종의 후실로도 볼 수 있지만 부인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 한 가지 추론은 묘덕이 정안(장흥) 임씨일 가능성이다. 고려 시대에는 봉작을 줄 때 남자들의 본관을 따랐지만 경우에 따라 현재 거주하는 지역명이나 부인의 본관을 쓸 경우도 있었다. 당시 정안 임씨도 고려 문벌 귀족 가문이었기에 왕실과의 관련도 밀접해 보인다.
이처럼 당시 불교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묘덕은 상당한 신분이나 재력을 소유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국빈 대우를 받았던 인도에서 온 지공으로부터 나옹이나 각경보다 먼저 계첩을 받았던 것으로 볼 때 왕실 인물일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 여주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에 기록된 24명의 비구니 명단에서 정업원 주지 묘봉 다음에 기록된 것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 정업원은 도성 내에 있던 비구니 사찰로 국왕의 행차가 이루어질 정도로 왕실 또는 국가권력과 연관되어 비호를 받았던 곳이다. 묘덕도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인물로 정업원에 소속된 비구니였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5) 묘성(妙性), 영조(靈照), 성공(性空) 등
취암사에서 『직지』 간행에 조연으로 참여했던 묘성, 영조, 성공은 『어록』 간행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다른 사료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성공은 동일인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1383년(우왕 9)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 건립에 화사(化士)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 음기에는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의 사부대중으로 나누어 단월의 이름이 대거 열거되어 있다. 『직지』 간행 당시 조연으로 참여한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 윤씨(尹氏) 등도 확인된다.
2. 『직지』 간행의 후원자
1)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 윤씨(尹氏)
1378년 『직지』 간행에 후원자로 기록된 영평군부인 윤씨의 이름을 50여 년 전 기록인, 1324년(충숙왕 11)에 김개물(金開物)이 지은 「김변처허씨묘지명(金賆妻許氏墓誌銘)」에서 찾을 수 있다. 묘지의 주인은 김변(金賆, 1248~1301)의 처인 양천군부인(陽川郡夫人) 허씨(許氏, 1255~1324)로 그녀의 아버지가 허공(許珙, 1233~1291)이며, 어머니가 영평군부인 윤씨였다. 윤씨는 문평공(文平公)인 윤극민(尹克敏)의 딸로, 문평공은 시중(侍中) 윤관(尹瓘)의 후손이다. 영평군부인 윤씨의 자식으로는 맏이인 양천군부인 허씨, 양천군(陽川君) 허숭(許嵩), 그리고 원종(元宗)의 조카인 평양공(平陽公) 현(胘)에게 시집갔다 다시 충선왕비가 된 순비(順妃) 등이 있다. 양천군 허숭의 아들이 바로 정안군 허종으로 영평군부인 윤씨의 손자이다. 묘덕이 출가 전 정안군의 부인이었다면, 영평군부인 윤씨가 시할머니가 된다. 그런데 허공의 부인으로 영평군부인 윤씨의 나이를 짐작해 봤을 때, 1378년 『직지』 간행과 1383년 신륵사대장각기비 불사에도 동참한 윤씨와는 시간적인 차이가 많이 나기에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
2)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
『직지』와 『어록』의 목판 간행에 조연으로 참여했던 북원군부인 원씨는 비구니 묘덕도 참여했던 1379년 여주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 건립에 단월(檀越)로도 참여했다. 원씨의 경우 묘수(妙守)라는 법명이 비문에 함께 새겨져 있다.
구성군부인 이씨는 『직지』 목판 간행에 조연으로 참여한 기록 외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3) 김계생(金繼生)과 박총(朴叢)
김계생은 이색이 쓴 『직지』 서문에 ‘판각(判閣) 김계생이 시주하여 법린을 도왔다’라는 기록과 『어록』에 ‘김판각을 위해 전호군연창(前護軍延昌) 박총(朴叢)이 글을 썼다’라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김계생은 비구니 묘덕과 북원군부인 원씨와 함께 1379년에 여주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 건립에 단월로도 참여했다. 1392년(공양왕 4)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김계생을 도운 박총은 밀직사의 정3품 벼슬의 지신사(知申事)로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1390년에 포상했는데, 그는 당시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3. 『직지』 간행의 실무자 : 서원과 각수
취암사 간행에 참여했던 서원과 각수의 승려들 중 백운 화상의 문도로 확인되는 기록은 없다. 다만 서원으로 참여한 천긍(天亘)의 경우, 1385년(우왕 11)에 세운 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의 음기에 기록된 107명의 선사(禪師)들 중에서 같은 법명을 찾을 수 있다. 동일인이라면 천긍은 태고 보우의 문도였다.
백운은 생전에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의 제자로서 가지산문을 대표한 목암 찬영(木庵粲英, 1328~1390)과 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 상총(尙聰) 등과도 교류를 했다. 찬영이 백운의 『어록』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천긍이 『직지』 간행에 참여한 것도 그만큼 백운의 저술이 널리 유통되기를 바랐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색은 「향산윤필암기(香山潤筆菴記)」에서 “보제(나옹)의 제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그가 입적한 후에 그의 부도와 진영을 모시는 진당(眞堂)에 새길 기문 등을 지으려는 승려들이 줄을 이을 만큼 많았다.…(중략)…보제가 살아 있을 적에는 비방하는 자들이 그렇게도 많았건만, 막상 죽고 나자 그를 사모하여 따르는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아, 사람의 마음이란 과연 누가 주관하는 것인가.”라고 당시의 세태를 보여 주고 있다.
백운은 생전에 문도를 거느리지 않았다. 국사나 왕사 자리도 마다하고 오롯이 출가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자신이 입적하면 화장해 흩뿌리고 부도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스승의 유훈을 받들어 비마저 세울 수도 없었지만 깨달음을 위한 선수행의 지침이 될 『직지』와 스승의 『어록』만은 몇몇 제자들과 후원자들의 노력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 집필자 : 서수정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전문연구원)
관련주석
- 주석 1 ‘연화(緣化)’란 인연이 있는 사람을 인도하고 교화한다는 뜻으로, 불사(佛事)의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불사에 돈이나 물건을 기부하게 하여 공덕을 쌓아 좋은 인연을 맺게 한다는 ‘모연(募緣)’과도 유사하다. ‘시주(施主)’는 불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시주하여 연화를 돕는다는 의미에서 ‘조연(助緣)’과 유사하다. 불사에서 이들의 명단을 각각 ‘연화질(緣化秩)’과 ‘시주질(施主秩)’로 구분해서 부른다.
- 주석 2 이색의 서문에 기록된 ‘법린 정혜(靜慧)’를 대부분 두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정혜를 수선사 제14세 법주인 정혜(淨慧)국사 복암(復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문에 나오는 법린 등 『직지』 간행에 참여한 인물들이 모두 연화질에 기록되어 있는 반면 정혜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볼 때 법린의 법명이 정혜일 가능성도 있다.
- 주석 3 지금까지 알려진 『문수최상승무생계첩』 3점 중 나옹 왕사가 수지한 『나옹계첩』은 금강산 유점사에서(조선총독부, 『조선고적도보』 제7권, 圖3248-3249), 『각경계첩』은 해인사 금동비로자나불 복장에서, 『묘덕계첩』(2016년 3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은 개인소장 자료에서 확인되었다.
- 주석 4 정안군으로 봉작을 받은 인물로는 허종 이외에도 익흥군 왕련(王璉)의 후손인 왕신(王愼)의 아들인 정안군 왕시(王諟)도 있다. 『고려사』 권91, 「열전」 제4, 종실(宗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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