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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의 간행 : 청주 흥덕사(1377)와 여주 취암사(1378)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8~1374) 화상은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에게 법을 참구하기 위해 1351년(충정왕 3)에 원나라에 가서 이듬해 1월에 돌아올 때 석옥 선사가 손수 쓴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받아 왔다. 귀국해서 20년간 소중히 간직했던 책을 75세 때인 1372년(공민왕 21)에 제자인 법린(法隣)의 도움을 받아 법어(法語)를 추려서 상·하 2권으로 『직지』를 편찬하였다. 석옥 청공이 쓴 원본이 전하지 않아[1]1382년에 편찬된 『석옥청공선사어록(石屋淸珙禪師語錄)』에는 『불조직지심체요절』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그리고 『석옥청공선사어록』에 수록된 「사세게(辭世偈)」는 1354년에 법안이 백운에게 전한 「사세송」과 그 내용이 다르다. 또한「복원석옥청공선사탑명」에도 그의 제자를 고려에서 온 태고 보우로 기록하고 있다. 백운이 어떤 책에서 발췌해서 어느 부분을 증보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또한 석옥과 백운의 『어록』에도 『직지』에 대해 직접 언급된 부분이 없다. 백운 화상이 편찬한 『직지』는 1374년에 백운이 입적하고 3년이 지난 1377년 7월에 백운의 문인인 석찬(釋璨), 달잠(達湛), 비구니 묘덕(妙德) 세 사람에 의해 청주목 외근에 위치한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다. 흥덕사에서 간행한 금속활자본은 현재 상권이 전하지 않고 하권 1책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하권의 본문이 끝나고 권말에 간기와 연화(緣化)와 시주(施主)만 새겨져 있고, 간행 경위를 알 수 있는 발문이 없다. 금속활자로 간행된 지 1년이 채 안 된 1378년 6월에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도 『직지』를 『백운화상어록』(이하 『어록』으로 약칭)과 함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상·하권이 모두 남아 있는 취암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직지』에는 하권 권말에 1372년에 백운 화상이 쓴 발문과 상권 서두에 1378년 4월에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서문과 1377년 3월에 성사달(成士達, ?~1380)이 쓴 서문이 있다. 특히 목판본에 실린 두 서문의 작성 시기가 1년이라는 시간 차이를 보이고 있기에, 여기에서 간행 경위의 변화를 살필 수 있다. 1. 백운의 발문(1372년) 『직지』 하권 본문이 끝나고 그다음 장에 행서체로 쓴 글이 있다. 임자년(1372) 9월 성불산(成佛山)에 머물렀던 75세 노비구 백운 경한이 손수 쓴 글이다. 그는 법린의 도움으로 『직지』를 2권으로 편찬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법린(法隣) 선인(禪人)이 정성껏 법어를 찾고 나의 일을 독려하고 도와주었다. 부득이 노안을 비벼가며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이 바로 깨달아 증득한 심체(心體)의 요긴한 조목들’을 발췌하고 기록하여 2권으로 만들었다. 책이 완성되어 법린이 왔기에 ‘나면서부터 석가이거나 자연히 이루어진 미륵이란 없으니, 반드시 정신을 바짝 차려서 말 밖의 이치를 보아야 한다[見之言外]’라고 간절히 당부했다.
2. 성사달의 서문(1377년) 공민왕 때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던 성사달은 1377년 3월에 『직지』의 서문을 썼다. 1378년 취암사에서 간행할 때 그가 쓴 서문의 원고를 그대로 목판에 새겼다. 그는 백운 선사가 원나라 구법 후에 『직지』를 편찬하게 된 목적과 자신이 석찬의 청으로 서문을 짓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그림 1)
경한 선사는 귀국한 후에 불도가 더욱 드러났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석옥 선사가 손수 가려 뽑은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법어를 2권으로 증보하여 후대에 남겨 놓았다. 배우는 이들이 이 책을 부지런히 공부한다면 자연스레 도에 들어맞을 것이요, 힘이 덜 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초록한 것을 보고서도 [서문을 쓰지 않는다면] 석찬 스님의 청을 거듭 거절하는 것이니 비천한 말이나마 서두에 써 보았다.
〈그림 1〉 『직지』 목판본(1378) 상권 장차 제4장 성사달 서문 (장서각 소장본)
3. 이색의 서문(1378년) 이색은 고려 말 문신이자 학자로 불교계와의 교류로 많은 시와 기문을 남겼다. 그는 성사달이 서문을 쓴 지 1년이 지난 1378년(우왕 4) 4월 5일에 서문을 지었다. 취암사에서 『직지』를 간행하기 2개월 전에 쓴 것으로, 성사달의 서문에 비해 『직지』의 편찬과 간행 경위가 좀 더 자세하다.
백운 경한 선사는 강남 하무산 석옥 청공 선사에게서 법을 전수받았다. 석옥 선사가 손수 쓴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경한 선사에게 주면서 ‘마땅히 말 밖의 이치를 보아야 할 것[當於言外見之可也]’을 당부했다.…(중략)…석옥 선사의 책이 간략한지라 이를 신중하고 깊게 회고하면서 145가(家)의 법어를 초록하여 2권으로 나누어 책을 만들었다. 이것은 불문에 입문한 수행자들을 이롭게 하고자 함이었다.(그림 2)
〈그림 2〉 『직지』 목판본(1378) 상권 장차 제1장 이색 서문 (장서각 소장본)
백운 선사는 77세에 취암사(鷲巖寺)에서 입적했다. 문도인 법린(法隣) 정혜(靜慧)가 목판에 새겨 널리 전하고자 하였고, 판각(判閣) 김계생(金繼生, ?~1392)이 경비를 내어 도왔다. 법린이 이색에게 서문을 부탁했고, 법린의 청을 차마 사양할 수 없어 서문을 적게 되었다.(그림 3)
〈그림 3〉『직지』 목판본(1378) 상권 장차 제2장 이색 서문 (장서각 소장본)
성사달과 이색의 서문에서는 석옥 청공 선사가 손수 쓴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백운 선사에게 직접 주었고, 말[글]에서 전하고자 한 이치를 직접 체득해 봐야 함을 당부한 사실을 동일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성사달에게는 백운의 제자인 석찬이 서문을 부탁했고, 이듬해 이색에게는 백운의 또 다른 제자 법린이 서문을 부탁했다. 이것은 같은 해 취암사에서 판각한 『어록』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색은 『직지』와 『어록』의 두 서문을 같은 날인 1378년 4월 5일에 지었다. 이색은 백운의 제자인 법린 정혜와 판각 김계생이 백운의 저술을 목판에 새기고자 자신에게 서문을 청했고, 법린이 아니었다면 백운의 풍모를 자신과 후세 사람들이 흠모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구 (李玖)[2]『어록』「상군수이재신[구]서(上軍須李宰臣【玖】書)」에 나오듯이, 이구는 생전에 백운과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친분이 있었다.는 1년 전인 1377년 3월에 『어록』의 서문을 썼다. 자신의 친한 벗인 선교도총통 목암 찬영(木庵粲英, 1328~1390)이 백운 화상의 어록을 보여 주었고, 이 어록에 백운 선사의 정수(精髓)가 온전히 담겨 있어 후학들에게 사숙의 지남이 될 만한 글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백운의 제자인 달잠과 석찬이 목판에 새겨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1377년에 이미 『어록』을 목판으로 간행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377년에 작성된 성사달과 이구의 서문을 통해서 『직지』와 『어록』의 간행을 백운의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먼저 기획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실제 같은 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직지』를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먼저 간행하였다. 1년이 지난 1378년에는 백운의 다른 제자인 법린이 김계생을 비롯한 여러 시주자들의 후원을 받아 『직지』와 『어록』을 목판으로 다시 간행하였고, 『직지』와 『어록』의 목판을 백운 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에 보관했다. 1378년 목판본의 연화질에 석찬과 달잠의 이름이 없었던 이유는 1377년 흥덕사와는 별도로 진행된 불사였으며 당시 불사를 주도했던 인물이 법린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비구니 묘덕만은 독립된 두 불사에 모두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왜 청주 흥덕사였을까 『직지』를 석찬과 달잠이 목판이 아닌 금속활자를 선택해 간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4세기 후반에 중앙이 아닌 지방의 한 사찰이었던 흥덕사가 당시 금속활자를 주자(鑄字)하여 불서를 간행한 사찰로 운영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흥덕사는 고려 말 이후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1972년에 『직지』가 국내에 알려진 이후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 1985년에 청주시 운천동 일대에서 ‘흥덕사(興德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고려시대 청동금구(그림 4)가 발견되면서 그 위치를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청동금구 측면에는 ‘갑인오월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壹坐)’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갑인년은 1194년(명종 24) 혹은 1254년(고종 41)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림 4〉 청동금구와 ‘흥덕사’가 새겨진 명문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이후로 금당터와 강당터, 탑터와 이들을 둘러싼 회랑터의 일부가 발견되었고, 각종 기와와 전돌, 발우, 금강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흥덕사 터는 1986년 5월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발굴지에 금당과 삼층석탑이 복원되어 있다.(그림 5)
〈그림 5〉 청주 흥덕사지 전경
여주 취암사에 『직지』 목판을 보관하다 『직지』의 목판본에는 백운의 발문에 이어 1378년 6월인 ‘선광팔년무오유월일 간(宣光八年戊午六月日 刊)’이라는 간행 시기가 새겨져 있다. 그다음 장에 간행에 참여한 연화와 시주질을 기록한 다음 맨 마지막 줄에 천녕 취암사 유판[留板川寧鷲嵓寺]으로 목판을 보관한 장소를 밝혀 두었다. 목판을 백운의 입적처인 취암사에 보관했지만 실제 목판을 판각한 장소는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있다. 천녕은 현재 경기도 여주시의 옛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7 불우(佛宇)조에 ‘취암사·상원사(上院寺)·고달사(高達寺) 모두 혜목산(慧目山, 현 우두산)에 있다’는 기록과 『범우고』(1799)에 ‘취암사는 혜목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취암사는 18세기 후반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2020년 6월에 여주시와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여주 혜목산 추정 취암사지 시·발굴조사’를 착수했으며, 현재 조사를 이어가고 있다.
· 집필자 : 서수정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전문연구원)
관련주석
  • 주석 1 1382년에 편찬된 『석옥청공선사어록(石屋淸珙禪師語錄)』에는 『불조직지심체요절』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그리고 『석옥청공선사어록』에 수록된 「사세게(辭世偈)」는 1354년에 법안이 백운에게 전한 「사세송」과 그 내용이 다르다. 또한「복원석옥청공선사탑명」에도 그의 제자를 고려에서 온 태고 보우로 기록하고 있다.
  • 주석 2 『어록』「상군수이재신[구]서(上軍須李宰臣【玖】書)」에 나오듯이, 이구는 생전에 백운과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친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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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지』 목판본(1378) 상권 장차 제4장 성사달 서문 (장서각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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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지』 목판본(1378) 상권 장차 제1장 이색 서문 (장서각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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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지』 목판본(1378) 상권 장차 제2장 이색 서문 (장서각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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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금구와 ‘흥덕사’가 새겨진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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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흥덕사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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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서 백운 경한(1298~1374) | 1378 | 장서각 소장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상·하권은 1372년 백운화상이 편찬하고,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으로 인쇄한 책이다. 이 책은 2권 1책으로 크기는 세로 21cm, 가로 15.8cm이다. 이색(李穡)과 성사달(成士達)의 서문, 백운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1992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이와 같은 판본의 책이 국립중앙도서관과 영광 불갑사에서 확인되었다. 상세정보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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