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원오 극근(圜悟克勤, 1063~1135) 선사는 ‘사람이 설사 자성(自性)을 깨달았다 하여도 그것은 완전한 단계가 아니다. 마치 어린 새가 막 세상에 나온 것과 같으니, 마음이 철저히 무심(無心)에 들어가 한 점의 물건도 남아 있지 않도록 보임(保任)[1]보임(保任)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줄임말로 보림이라고도 읽는다.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 것, 특히 선종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부지런히 수행하여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수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1351년 5월에 원나라 석옥 화상을 찾아가 법을 묻고 참구한 끝에 백운은 1352년 1월에 마침내 무심무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해 3월에 귀국한 백운은 스승에게서 참구한 수행을 오롯이 이어가고자 했다.
1352년(공민왕 1, 55세) 4월, 성각사(性覺寺)에 머물면서 수행에만 전념하다 (『어록』)
성각사는 백운이 귀국한 후 처음 머문 사찰로 개경 성문 남쪽 밖 30여 리에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생활하며 참선하고 염송하기도 했다. 대중과 함께 크고 작은 일을 하면서도 마음의 자취를 드러내거나 눈에 띄는 언행을 하지 않았다. 종일 무심과 무위(無爲)의 수행을 이어갔다.
1353년(공민왕 2, 56세) 1월 17일, 성각사에서 무심무념을 체득하다 (『어록』)
백운은 영가 현각(永嘉玄覺) 대사의 『증도가』 중 “망상을 쓸어 없애지도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으니, 무명의 진실한 성품 그대로 불성이요, 허깨비같이 허망한 육신 그대로 법신이로다.”라는 구절에서 홀연히 무심(無心)을 체득하게 되었다. 일념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 경계도 끊어져 본래 움직인 것이 없다. 지금에야 비로소 고요해진 것도 없으니 평등하고 또 평등하여 처음부터 본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운은 석옥 선사에게 배운 ‘무념’의 참된 종지와 ‘무심’의 이치를 이때 완전히 통달하고 체득했던 것이다.
1354년(공민왕 3, 57세) 3월, 해주 안국사(安國寺)에서 지공 화상에게 게송을 올리다 (『어록』)
깨달음을 얻은 후에 백운은 본래 마음과 도의 경지를 게송으로 지어 지공 화상에게 전했다. 안타깝게도 1352년 7월에 스승 석옥 선사가 입적했기에 그에게는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다.
같은 해 6월 4일, 법안(法眼) 선인이 석옥 화상의 사세송(辭世頌)을 전해 주다.
14일에 해주 안국사에서 재를 베풀고 법문하다 (『어록』)
원나라 호주 하무산 천호암에서 법안 선인이 석옥 선사가 입적 즈음에 지은 사세송을 가지고 와서 백운에게 전해 주었다.
백운을 사고 맑은 바람은 팔았더니,
가산은 온통 흩어져 뼈가 시리도록 가난하구나.
한 칸의 띠풀 집은 남겨 두었으니,
떠나려는 이 순간 병정동자에게 전해 주노라.
백운은 석옥 화상에게 일종의 전법게를 받은 것이다.
1357년(공민왕 6, 60세) 9월, 선지(宣旨)에 답하며 서신을 올리다 (『어록』)
백운은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병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사양하는 서신을 올렸다. 서신에서 자신을 나무꾼조차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散木]로 비유하였다. 수행자로서 본분사를 지키려 했던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1365년(공민왕 14, 68세) 6월 21일,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주지로 취임하여 법문하다 (『어록』)
나옹 혜근의 추천으로 해주 신광사의 주지를 맡고 법문을 하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고 속은 속이다. …그 뜻을 잘 알겠는가?…
스스로 깨달은 자란 어떠한가? 현재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항상 맑고 고요하다.…(중략)…지난해에는 손님의 입장이었다가 이제야 주인이 되었는데, 특별히 기특한 일은 없으나 당당히 드러난 6척의 몸이 아주 분명하구나.
같은 해 6월, 신광사로 들어가며 나옹대(懶翁臺) 시에 차운하는 시를 짓다 (『어록』)
신광사 주지로 취임해 갔을 때 신광사에 대를 지어 사람들이 ‘나옹대’라 칭한 것을 보고 지은 시이다.
같은 해 8월, 신광사 주지를 사양하는 서신을 올리다 (『어록』)
신광사 주지를 맡은 지 2개월 만에 주지직을 사양하는 서신을 공민왕에게 올렸다. 자신은 나이 든 노승이니 젊고 불도를 갖춘 이를 주지로 삼아 청규(淸規)를 크게 진작하고 조사의 도를 떨치기를 부탁하였다. 백운 자신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대법(大法)을 밝히고 공민왕의 득도와 장수를 기원하며 은혜를 갚고자 한다는 게송을 지어 올렸다.
1368년(공민왕 17, 71세) 흥성사(興聖寺)에서 안거를 지내고 법문하다 (『어록』)
공민왕의 명을 받고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이 흥성사에서 안거하고 법문하였다.
모든 법은 현재 있는 그대로 진실할 뿐이고, 현재 있는 그대로 해탈이며, 현재 있는 그대로 고요한 것이다.…(중략)…그래서 노승은 ‘주장자를 보고는 다만 주장자라 부르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고 속은 속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진실한 참선과 진실한 깨달음[實參實悟]이란 무엇인가? 범부와 성인이라는 분별에서 벗어나 참구하고, 분별하는 마음도 없고[無心] 억지로 하는 행위도 없는[無爲] 도를 배워서, 면밀히 수행하고 언제나 망념 없이 항상 뚜렷하게 깨어 있으며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깊고 고요한 경지에 이른다면, 자연히 도와 하나가 될 것이다. 옛사람이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야 비로소 본래인을 볼 수 있다.’라고 한 말을 모르는가!
부처님께서 교(敎)의 바닷물은 아난의 입에 쏟아부었고, 선(禪)의 등불은 가섭의 마음에 붙였다. 먼저 가섭에게 선의 등불을 전하여 초조로 삼았다. 이로부터 인도의 28대 조사와 중국의 6대 조사가 대대로 전승하여 등불에서 등불로 이어졌으니 이들 모두 석가여래의 제자인 것이다.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은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한 부처가 다른 부처에게 직접 건네준 것도 이 종지를 건네준 것이며, 한 조사가 다른 조사에게 전해 준 것도 이 마음을 전해 준 것이다. 선과 교를 융합하여 서로 통하게 하면 통하지 못할 것이 없고, 서로 소통시켜 바로잡으면 바로잡지 못할 것이 없으니, 바르거나 바르지 못한 차이는 오로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1369년(공민왕 18, 72세) 1월, 고산암(孤山菴)에 우거할 때 지공 화상 진영에 2수의 게송을 짓다 (『어록』)
백운은 고산암에서 생활을 그린 〈거산(居山)〉이라는 장편의 시에서 깨달음과 마음의 본체를 더없이 유유자적하게 읊고 있다.
1370년(공민왕 19, 73세) 9월 16일, 광명사(廣明寺)[2]광명사(현재 개성시 만월동 연경궁 북쪽 송악산록에 있는 사찰)는 고려 시대 선종의 중심 사찰로 담선법회를 개최하는 3대 선찰 중 하나였다. 선종 출신 왕사가 개경에 머물 때 주석하는 사찰이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개성지역의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서의 위상을 이어 나갔는데, 양주의 회암사(檜巖寺)와 함께 왕사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가 주석한 곳이기도 하였다.에서 열린 공부선(功夫選)[3]공민왕이 개최한 공부선은 기존의 승과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선종과 교종의 모든 승려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치러진 시험이었다. 나옹이 주관하였고, 화엄종 승려로 당시 국사였던 설산 천희(雪山千熙, 1307~1382)가 증명법사로, 백운이 시관으로 참여하였다. 공부선은 공민왕이 불교계의 전면적인 개편과 나옹을 중심으로 한 선종이 중심이 될 것임을 선언하는 사건이었다. 공부선의 유일한 합격자는 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로 나옹의 대표적인 계승자가 되었다.에 시관(試官)으로 참여하다 (『어록』)
공부선 하루 전날인 9월 15일, 공민왕으로부터 공부 방편을 여럿 가운데 선별하라는 교지(敎旨)를 받은 백운은 학인들의 공부를 점검하는 방편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였다.[4]공부선에 대해 나옹은 삼구-공부십절-삼관의 단계를 제시한 반면, 백운은 시험의 단계가 아닌 수행의 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그중 무심무념을 최고의 경지로 제시하였다.
① 화두(話頭) : 조주의 ‘무자’, ‘만법귀일’, ‘부모미생전면목’ 등
② 수어(垂語) : ‘정전백수자’, ‘마삼근’, ‘간시궐’ 등
③ 색(色) : 건추(犍槌)를 잡거나 불자(拂子)를 세우는 것 등
④ 소리[聲] : 주장자를 내려치며 할을 하는 것, ‘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느냐’ 물은 것 등
⑤ 언어(言語) : ‘밥을 먹었느냐’라는 조주의 물음에 학인이 ‘먹었습니다’고 답하자 조주가 ‘발우나 씻어라’라고 말해 주어 그 학인이 깨달은 사례 등
⑥ 무심(無心)·무념(無念) : 육조 혜능은 ‘선(善)이라고도 악(惡)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히 청정한 마음의 본체에 들어설 것이니 항상 고요하지만 묘용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을 것이다.’라고 한 것, 황벽 희운은 ‘도를 배우는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서 무심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무수히 오랜 겁 동안 수행하더라도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라고 한 것 등
1372년(공민왕 21, 75세) 9월, 성불산(成佛山)[5]백운 선사가 『직지』를 편찬한 성불산이 정확히 어느 지역 어느 사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1 황해북도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에 ‘연봉사(煙峯寺)·성불사(成佛寺)·산암사(山菴寺)·묵방사(墨彷寺) 등의 사찰이 있는 성불산’과 권50 함경남도 길성현(吉城縣)에 있는 ‘옛적엔 향수사(香水寺)라고 불린 덕수암(德水庵)과 장수사(長壽寺)가 있는 성불산’, 그밖에 함경북도 길주군, 경상도 대구도호부 등에 소재한 성불산이 확인된다.에서 『직지』를 편찬하다 (『직지』)
백운은 1351년 원나라에 갔을 때 석옥 선사에게서 받은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소중하게 보관하였는데, 공부선 이후에 성불산으로 들어가 이 책을 다시 편찬하고자 했다. 75세에 노안에도 불구하고 제자 법린(法隣)의 도움을 받아 ‘부처와 조사 스님들이 바로 깨달아 증득한 심체(心體)의 요긴한 조목들’을 발췌하여 2권으로 만들었다.
백운은 직접 쓴 발문(그림 1)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위엄을 부릴 것이 못되며, 성인(聖人)은 오히려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염려한다’는 내용으로 수행자가 경계해야 할 것을 먼저 말하였다. ‘생각은 일어났다 지속되다 변하고 없어지는 것[生住異滅]이고, 몸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生老病死]이며, 국토나 삼라만상은 생겼다 유지되다 무너지고 나중에는 텅 빈 공으로 돌아가는 것[成住壞空]이다. 이러한 세상의 무상(無常)한 이치야말로 참으로 신기하고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직지』를 편찬하게 된 경위와 함께 제자 법린에게 ‘나면서부터 석가이거나 자연히 이루어진 미륵이란 있지 않으니, 반드시 정신을 바짝 차려서 말 밖의 이치를 보아야 한다[見之言外]’라고 당부했다. 백운은 끝으로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고인(古人)의 말을 인용하였다.
의지를 내서 발원하는 것은 얕고 얕은 지견(知見)을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들이 직접 깨달은 경지에 자신도 도달하는 데 있다. 그래야 마침내 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옛 가르침으로 그대의 마음을 비추고 있는가![古敎照心不]
〈그림 1〉 『직지』 목판본(1378)에 수록된 백운의 발문 (장서각 소장본)
1374년(공민왕 23, 77세), 여주 천령현 취암사(鷲巖寺)에서 입적하다 (『어록』)
백운은 임종하기 전 ‘항상 모든 것이 공(空)이라는 이치를 알아차리고, 하나의 법이라도 분별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지 마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을 쓰는 경지이니, 부지런히 수행하라.’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며 임종게를 남겼다.
인생 70세는 예부터 드문 일.
77년 전에 왔다가 77년 뒤에 가노라.
곳곳마다 돌아갈 길이요, 하나하나가 모두 고향이거늘,
어찌 반드시 배를 타고 굳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가!
이 몸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또한 머무는 곳이 없으니,
재를 만들어 사방에 뿌리고, 신도들의 땅을 차지하지 마라.
백운은 자신이 입적하고 난 뒤 화장해 재를 흩어 버리고 신도들의 땅을 차지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유언하였다. 사리를 찾아 부도와 비를 세우는 일 등을 하지 말라는 당부와도 같다.
태고나 나옹이 국사와 왕사에 봉해져 선종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에 비해 백운이 사회적으로 남긴 자취와 시대적 평가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운은 오십이 넘은 나이에 원나라로 가서 석옥 청공에게 법을 묻고 무심무념의 수행법을 참구해서 확신을 가졌으며, 귀국한 이후에도 수행을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해 마침내 스스로 깨달음을 증득하였다. 이후로 20여 년 동안 줄곧 법문과 출가수행자로서 본분을 지키려 했던 백운 선사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귀감이 된다. 백운 선사가 마지막으로 남긴『직지』에서 전하고자 했던 뜻을 이제는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 집필자 : 서수정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전문연구원)
관련주석
- 주석 1 보임(保任)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줄임말로 보림이라고도 읽는다.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 것, 특히 선종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부지런히 수행하여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 주석 2 광명사(현재 개성시 만월동 연경궁 북쪽 송악산록에 있는 사찰)는 고려 시대 선종의 중심 사찰로 담선법회를 개최하는 3대 선찰 중 하나였다. 선종 출신 왕사가 개경에 머물 때 주석하는 사찰이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개성지역의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서의 위상을 이어 나갔는데, 양주의 회암사(檜巖寺)와 함께 왕사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가 주석한 곳이기도 하였다.
- 주석 3 공민왕이 개최한 공부선은 기존의 승과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선종과 교종의 모든 승려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치러진 시험이었다. 나옹이 주관하였고, 화엄종 승려로 당시 국사였던 설산 천희(雪山千熙, 1307~1382)가 증명법사로, 백운이 시관으로 참여하였다. 공부선은 공민왕이 불교계의 전면적인 개편과 나옹을 중심으로 한 선종이 중심이 될 것임을 선언하는 사건이었다. 공부선의 유일한 합격자는 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로 나옹의 대표적인 계승자가 되었다.
- 주석 4 공부선에 대해 나옹은 삼구-공부십절-삼관의 단계를 제시한 반면, 백운은 시험의 단계가 아닌 수행의 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그중 무심무념을 최고의 경지로 제시하였다.
- 주석 5 백운 선사가 『직지』를 편찬한 성불산이 정확히 어느 지역 어느 사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1 황해북도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에 ‘연봉사(煙峯寺)·성불사(成佛寺)·산암사(山菴寺)·묵방사(墨彷寺) 등의 사찰이 있는 성불산’과 권50 함경남도 길성현(吉城縣)에 있는 ‘옛적엔 향수사(香水寺)라고 불린 덕수암(德水庵)과 장수사(長壽寺)가 있는 성불산’, 그밖에 함경북도 길주군, 경상도 대구도호부 등에 소재한 성불산이 확인된다.
관련자료
더보기 +
더보기 +
더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