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 경한(白雲景閑, 1298~1374)은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과 함께 고려 말을 대표하는 선사(禪師)였다. 하지만 태고나 나옹에 비해 백운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백운의 행적을 기록한 행장이나 탑비가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1]나옹이 입적한 후 그의 문도들이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1377), 여주 신륵사 보제선사 사리석종비(1379), 영변 안심사 지공 나옹 사리석종비(1384), 원주 영천사 보제존자 탑지석(1388), 금강산 정양사 삼한 나옹명 부도 등을 세운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태고의 경우에도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1385)와 양근 사나사 원증국사 사리석종비(1386)가 세워졌다.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指空, 1300?~1363) 화상의 부도도 1372년 회암사와 1393년 화장사에 세워졌다. 백운 화상이 입적한 후 그의 비와 부도가 세워졌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백운의 문도들은 스승의 편찬서인 『직지』(1377, 1378)와 『어록』(1378)을 간행하였다. 하지만 『어록』에도 백운의 행장이 수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나마 백운이 입적한 후 그의 문도들이 『직지』와 『백운화상어록』[2]상하 2권으로 법어(法語)·게송(偈頌)·시문(詩文)·서장(書狀) 등을 백운의 시자인 석찬(釋璨)이 모아서 엮었으며, 서두에는 1378년에 쓴 목은 이색의 서문과 1377년에 쓴 이구의 서문이 실려 있다.(이하 『어록』으로 약칭)을 간행할 당시에 기록한 서문(序文)에 그의 행적이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고려 조계대선사(曺溪大禪師) 경한은 호(號)가 백운이며, 강남 하무산(霞霧山) 석옥 청공(石屋淸珙) 화상에게서 법을 전해 받았다. 이는 당신이 하신 말씀에도 잘 드러나 있다. 세수 77세에 취암사(鷲巖寺)에서 입적하였다. (『어록』, 이색(李穡)이 쓴 서문(1378년) 중에서)
백운 화상은 고부군(古阜郡) 출신으로서 어려서 출가하여 배움에 힘쓰며 도를 구하였다. 하무산 석옥의 법을 이어받았고 서천의 지공(指空)에게 의심나는 문제를 물었다. 계사년(1353) 음력 정월 17일에 마음을 밝히고 도를 깨달았다. 석옥이 임종하고 나서 임종게를 부쳐 왔다.…(중략)…임종게로써 석옥이 백운에게 법을 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록』, 이구(李玖)가 쓴 서문(1377년) 중에서)
백운 선사는 일찍이 승과(僧科)에 합격했지만, 곧바로 산으로 들어가 참선 수행에 전념했다. 자신이 체험한 것을 인가받고자 했던 선사는 1351년 원나라에 가서 호주(湖州 : 중국 절강성) 하무산에 주석하고 있는 석옥 청공 선사를 만나 선문답을 주고받았다. 석옥 선사는 경한 선사가 불도를 깊이 체득했음을 알아보고 그 가르침을 널리 펼 수 있도록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주었다. (『직지』, 성사달(成士達)이 쓴 서문(1377년) 중에서)
백운 경한 선사는 고려 조계종의 운석(韻釋: 시를 잘 짓는 스님)이었다. 강남 하무산 석옥 청공 선사에게서 법을 전수받았다. (『직지』, 이색이 쓴 서문(1378년) 중에서)
앞의 서문에서처럼 『어록』에는 백운이 54세가 되던 1351년(충정왕 3)에 원나라로 가서 석옥 청공(1272~1352)에게 법을 전해 받은 내용과 귀국한 이후에 행적이 주로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고려사』에 ‘1346년(충목왕 2)에 기우(祈雨) 의식을 맡은 승려 백운’이라는 기록과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의 조성 발원문에 ‘친전사(親傳師) 백운’이라는 기록에서도 그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백운 화상의 삶과 수행의 전환기가 되는 원나라 구법 전후로 나누어 그의 행적을 천천히 따라가 보려 한다.
1298년(충렬왕 24), 고부군에서 태어나다 (『어록』)
출생지는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백운리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3]2022년 11월 7일에 정읍시가 ‘고부관아 복원 및 백운화상선양사업 추진위원회 출범식’을 열었다.
1307년(충렬왕 33, 백운 10세) 무렵, 출가하다 (『어록』)
일곱이나 여덟 살 무렵인 초츤(髫齔) 출가로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백운은 많아도 10세 이전에 출가했을 것으로 본다.
1346년(충목왕 2, 49세) 5월 13일, 기우제를 주관하다 (『고려사』)
충목왕 2년 5월에 가뭄이 심하자 승려 ‘백운(白雲)’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게 하였다.(그림 1) 국왕의 명으로 국가 차원의 기우제를 주관할 승려로 백운이 지목된 것이다.[4]백운의 기도에도 비가 내리지 않자 왕이 직접 내전(內殿)에서 기우도량(祈雨道場)을 열기도 하고, 무당들을 삼사(三司)에 모아 놓거나 사찰에서 비를 빌게 하기도 했다.
〈그림 1〉 『고려사』에 수록된 ‘백운(白雲)’의 기록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같은 해,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의 발원문을 짓다 (「성불원문」)
충청남도 청양군의 장곡사 하대웅전(下大雄殿)에 봉안되어 있는 금동약사여래좌상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을 통하여 이 불상이 백운 경한에 의하여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붉은 비단에 쓰인 장편의 발원문 1점과 여러 점의 묵서 기록에서 발원문과 불상이 1346년에 제작, 봉안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발원문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약사여래불의 유일한 복장 발원문이다. 불상을 조성하는 발원문에 적힌 참여자는 1천여 명이 넘어 고려 시대 불사(佛事) 관련 문서 중 최대 인원이 기록된 사례이다.
장곡사 불상 제작에 후원한 계층은 고려 왕족을 비롯해 하급 무관(武官)과 군부인(郡夫人)이 다수 보이는데, 하층민들도 다수를 차지하였다. 인명 중에는 몽고식 이름도 확인된다. 이 중에 공민왕으로 추정되는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의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발원도 있다. 발원문 마지막에는 ‘친전사(親傳師) 백운(白雲)’과 그의 수결이 적혀 있다.(그림 2) 이를 통해 백운이 발원문을 쓴 승려이며, 당시 장곡사 불사를 이끈 중심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2〉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성불원문에 기록된 ‘백운’과 수결
1346년에 장곡사 발원문과 같은 해 『고려사』에 기록된 백운은 고려 말 선사 백운 경한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국가 차원에서 행해진 기우제와 국왕의 측근을 비롯하여 다수의 관료들이 참여한 대규모의 불사를 이끌 만한 인물로서 당시 백운이라는 호를 사용한 인물은 백운 경한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원나라로 가기 이전인 40대 후반 무렵에 백운은 이미 다수의 재가 신도들의 추앙을 받는 동시에 국가의 기우 의식에 발탁될 만큼 명성이 높았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1351년(충정왕 3, 54세) 5월 17일, 원나라 호주 하무산 천호암에 가서 석옥 화상께 묻다 (『어록』)
백운은 54세 늦깎이에 스승을 찾아 법을 물으러 원나라로 떠났다. 그 배경에는 임제의 18대 적손(嫡孫)이었던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5]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는 중국 소주(蘇州) 상숙(常熟) 사람이며 속성은 온씨이다. 소주 흥교 숭복사(崇福寺)의 영유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뒤 급암 종신(及庵宗信)으로부터 임제의 법을 이었다. 선사에게 먼저 인가를 받고 온 태고 보우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태고 보우는 국내에서 화두 참구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나서 1346년 봄 중국에 건너가 석옥 청공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또한 원나라 황실의 귀의를 받아 연경(燕京)의 영녕사(永寧寺)에서 설법하는 등 명성을 떨치다 1348년(충목왕 4)에 귀국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백운도 선에 관심을 가지고 수행하다가 자신의 경지를 인가받고 본격적인 수행을 위해 원나라에 유학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백운은 석옥 선사에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하였다.
① 육조 혜능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한 뜻은 무엇입니까?
② 경전에 ‘존재하는 상(相)은 모두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닌 줄 안다면 부처님의 뜻을 알 것이다.’의 구절을 마음에 비추어 보면 ‘모든 법이란 오로지 참된 마음이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허깨비 같은 꿈이나 그림자와 같을 것입니다. 이 뜻이 진실합니까, 진실하지 못합니까?
③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주가 ‘없다’라고 답한 뜻이 무엇입니까?
같은 해, 지공(指空) 화상을 만나 제자로 삼아 주기를 청하고, 화상에게 법문을 듣고 나서 게송을 지어 바치다 (『어록』)
지공(指空, 1300?~1363) 화상은 인도 출신의 고승이다. 1326년(충숙왕 13) 3월에 원나라에서 고려로 건너와 수도 개경을 거쳐 금강산, 통도사, 회암사, 화장사 등지를 유력하면서 약 2년 7개월 동안 교화를 펼쳤다. 1328년 9월경에 고려를 떠나 연경(燕京)에 돌아가 법원사(法源寺)에 주석하였는데, 고려의 고승들이 그에게 법을 들으러 원나라로 찾아가기도 했다. 1347년에 나옹 혜근이 그를 친견했으며, 백운도 1351년에 지공 화상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 주기를 청하였다.
1352년(공민왕 1, 55세) 1월, 석옥 화상을 다시 찾아가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참구하다 (『어록』)
1월 12일, 백운은 무심무념(無心無念)의 참된 종지를 은밀히 계합하였다. 스승 석옥 선사에게 삼배를 올리고 세 번의 설법을 듣자 마침내 마음에 의심이 돌연 풀렸다. 무심의 위없는 참된 종지를 깊이 믿게 되었다. 이틀 밤을 더 머무르며 스승과 법담을 나누었다.
같은 해 1월 15일, 석옥 화상과 이별하고 휴휴암(休休庵)으로 가다 (『어록』)
같은 해 2월, 배를 타고 3월 22일에 귀국하다 (『어록』)
· 집필자 : 서수정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전문연구원)
관련주석
- 주석 1 나옹이 입적한 후 그의 문도들이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1377), 여주 신륵사 보제선사 사리석종비(1379), 영변 안심사 지공 나옹 사리석종비(1384), 원주 영천사 보제존자 탑지석(1388), 금강산 정양사 삼한 나옹명 부도 등을 세운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태고의 경우에도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1385)와 양근 사나사 원증국사 사리석종비(1386)가 세워졌다.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指空, 1300?~1363) 화상의 부도도 1372년 회암사와 1393년 화장사에 세워졌다. 백운 화상이 입적한 후 그의 비와 부도가 세워졌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백운의 문도들은 스승의 편찬서인 『직지』(1377, 1378)와 『어록』(1378)을 간행하였다. 하지만 『어록』에도 백운의 행장이 수록되어 있지는 않다.
- 주석 2 상하 2권으로 법어(法語)·게송(偈頌)·시문(詩文)·서장(書狀) 등을 백운의 시자인 석찬(釋璨)이 모아서 엮었으며, 서두에는 1378년에 쓴 목은 이색의 서문과 1377년에 쓴 이구의 서문이 실려 있다.
- 주석 3 2022년 11월 7일에 정읍시가 ‘고부관아 복원 및 백운화상선양사업 추진위원회 출범식’을 열었다.
- 주석 4 백운의 기도에도 비가 내리지 않자 왕이 직접 내전(內殿)에서 기우도량(祈雨道場)을 열기도 하고, 무당들을 삼사(三司)에 모아 놓거나 사찰에서 비를 빌게 하기도 했다.
- 주석 5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는 중국 소주(蘇州) 상숙(常熟) 사람이며 속성은 온씨이다. 소주 흥교 숭복사(崇福寺)의 영유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뒤 급암 종신(及庵宗信)으로부터 임제의 법을 이었다.
- 주석 6 태고 보우는 국내에서 화두 참구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나서 1346년 봄 중국에 건너가 석옥 청공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또한 원나라 황실의 귀의를 받아 연경(燕京)의 영녕사(永寧寺)에서 설법하는 등 명성을 떨치다 1348년(충목왕 4)에 귀국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백운도 선에 관심을 가지고 수행하다가 자신의 경지를 인가받고 본격적인 수행을 위해 원나라에 유학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자료
더보기 +
더보기 +
더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