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재는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공양하는 불교 의례이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와 고혼(孤魂)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큰 법회(法會)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는 고려시대에 시작된 후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2013년에는 삼화사·진관사의 수륙재가, 2014년에는 아랫녘 수륙재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1]미등(2022. 7. 29), 「수륙재,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가 함께하는 수승한 법회」, 『불광미디어』. https://www.bulkwang.co.kr
과거 수륙재는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하는 국행수륙재도 있었지만, 왕실의 발원이나 대규모의 죽음, 국난 등이 있을 때 비정기적으로 특별히 설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에도 사찰의 상황이나 신도의 요구에 따라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한편,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찰을 비롯하여 조계사, 무위사, 용주사 등에서는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을 전후로 수륙재 회향 법회를 성대히 열고 있기도 하다.
〈그림 1〉 수륙재 법문(진관사, 2023)(진관사)
수륙재의 역사
현행 수륙재의 기원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 464-549) 때로 소급된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을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여겨, 스스로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찬술하고 강소성 금산사(金山寺)에서 재의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수륙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고려 광종 19년(968)에 무차수륙회를 설행하였다는 간단한 기록이다. 선종 6년(1089)에는 개성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이라는 별도의 전각을 세웠다고 하여 수륙재 설행의 확산 조짐을 짐작할 수 있다. 공민왕 13년(1364)에는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천도를 위해 나옹화상이 국행수륙재를 처음으로 설행하였다는 기록도 전한다.
사료상으로 볼 때 수륙재는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보다는 오히려 조선시대에 더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건국 초에는 왕조 교체기의 혼란한 민심을 안정시키고, 권좌를 위해 살상했던 이씨 왕조의 죄를 씻기 위한 방편으로 수륙재를 개회하는 일이 잦았다. 조선 중기에 들어 국행으로 치르는 수륙재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불사로 여겨졌으며 왕실에서도 비공식적으로 행해졌다.
조선후기 승려들의 문집을 통해 여러 사찰에서 수륙재를 지낸 사실을 전한다.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의 『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을 예를 들어 보면, 해남 미황사에서 주최한 바닷가 수륙재에서 「천변불사소」와 「수륙법어」등을 지어 올렸다고 한다. 한편,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사(陵寢寺)로 1790년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고, 사찰에 금불(金佛)을 봉안한 날 즈음하여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최하였다. 무차대회는 수륙재의 다른 이름이므로 조선후기까지도 왕실이 주체가 된 수륙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근현대기에도 여러 신문기사 보도나 불교의례집 속 수륙의문의 존재를 통해서 수륙재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수륙재를 보존하는 문제가 대두되면서 인천수륙재를 시작으로 삼화사, 진관사, 아랫녘(백운사)의 수륙재가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외 사찰의 수륙재도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앞으로 수륙재의 전승과 보전이 기대되는 바이다.
현행 수륙재 모습
현행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수륙재의 경우 49재와 같은 칠칠재 형식으로 치러진다. 보통 중양절에 마지막 칠재가 봉행되도록, 양력 8월쯤 입재를 시작하여 이후 칠일 간격으로 초재에서 육재까지의 일정을 마련한다. 입재가 법회를 처음 여는 날이라면, 마지막 칠재는 수륙재의 회향일로 지금까지의 재의가 총화되는 날이다. 유주무주의 모든 생명이 구제되길 발원하면서 재의의 공덕을 두루 회향한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수륙재는 비슷한 가운데 사찰마다 독특한 특징이 있다. ‘삼화사수륙재’는 봉행 30일 전에 행향사(行香使)를 비롯하여 다양한 식전 의례를 행하고 있으며, 방생의식이 정식 절차로 들어가 있어 특징적이다. ‘진관사수륙재’는 양계(陽界)와 명계(冥界)로 나뉜 존재의 현재 상태를 고려하여 회향의식에서 낮재·밤재로 구별하여 봉행한다. ‘아랫녘수륙재’는 다른 수륙재에 비하여 민간성이 강조되며, 육재와 칠재 사이에 용왕재를 별도로 설행하고 있다. ‘인천수륙재’는 회심곡 등에서 소리할 때 법음이 장중하고 독특한 곡절을 채택하고 있어 다른 지역과 구분된다. 이외에도 화성 용주사, 서산 보원사, 강진 무위사, 부여 백제문화제 등에서 수륙재를 해마다 봉행하며 전통을 계승해 가고 있다.
수륙재의 현대적 의미
수륙재는 현재 불교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무형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수륙재의 전승은 비단 불교문화유산을 계승하거나 문화포교를 확대하는 차원을 넘어 불교의례의 사회적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수륙재는 사성육범(四聖六凡), 유주무주(有主無主) 고혼을 가리지 않고 우주의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공양과 법식을 베푸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무차평등(無遮平等)을 지향하는 수륙도량은 존재를 향한 생명존중과 연대의식이 절실한 오늘날의 사회적 화두를 풀어내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2〉 수륙재 어산단 범패 합송(진관사, 2023)(진관사)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미등(2022. 7. 29), 「수륙재,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가 함께하는 수승한 법회」, 『불광미디어』. https://www.bulkw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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