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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의식

낙화의식은 숯가루 등을 넣은 봉지를 줄에 매단 뒤 점화한 후 불꽃을 만들어 도량을 소재(消災)할 목적으로 행하는 불교의례이다. 불꽃이 떨어지면서 연출하는 장관을 보고 즐긴다는 뜻에서 ‘낙화놀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낙화의식은 처음에 부정과 재앙을 소멸하고 국가의 안녕과 복을 불러온다는 의미로 부처님오신날과 대보름 밤 등에 사찰에서 행해지다, 조선후기 민간으로 흘러들어 민속놀이로 정착되었다.
〈그림 1〉 사찰 낙화의식의 불꽃 구경(영평사, 2022)(영평사)
낙화의식의 역사와 의미 현재 낙화 관련 축제는 대부분 민간 주체 행사이다. 하지만 일제감점기 개성의 한 사찰에서 촬영된 부처님오신날 행사 사진에 수많은 인파가 낙화의식이 진행되는 도량에 몰려 있는 것[1]당시 총독부 촉탁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이 촬영한 사진으로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朝鮮の習俗』(1925, 68쪽)에 실려 있다고 한다. 이선이(2020), 「불교의례 낙화법의 기원과 형성과정 연구」, 『남도문화연구』 41, 순천: 남도문화연구소, 215쪽.을 볼 때, 당시만 해도 낙화의식이 사찰에서 활발히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낙화의식은 삼국시대부터 이어 온 연등회와 관련 있다. 연등회의 마지막을 장엄했던 관화의식이 그 유래이다. 연등회의 시작과 끝에는 ‘관등(觀燈)’과 ‘관화(觀火)’라는 의식이 있었다. 불교에서 ‘관등’은 부처님의 지혜를 보는 것, ‘관화’는 삿된 기운을 정화하는 것을 상징한다. 특히 관화의식에서 산 모양으로 쌓아 올린 나무에 불을 붙여 화산(火山) 형상의 거대한 불덩이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이을 보며 재앙과 재난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소망을 빌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낙화의식은 소재도량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관등·관화의식은 고려 태조 때 상원연등회에서 설행되다가, 조선 중기를 거치며 ‘낙화(落火)’란 이름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로는 국가 주도의 관화의식은 점차 사라져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관화의 기록이 종종 나타나지만 명종 16년(1561) 이후로는 자취를 감춘다. 연구자들은 그 원인 가운데 하나로 군수물자의 수급 제한을 꼽는다. 관화를 하려면 거대한 화산 즉, 큰 불덩이가 필요했는데, 조선 중기부터 군수물자의 하나인 염초와 황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서 급격히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중단됐던 국가적 관화 의식을 되살린 건 민간 영역이었다. 국가·왕실에서 설행하지 못하자 사찰과 민가에서 이를 받아 전승한 것이다. 다만 염초와 황은 구하지 못해 숯을 중심으로 소금, 향 등을 섞어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사찰의 낙화의식과 민간의 낙화놀이 국가·왕실이 행했던 관화는 거대한 불덩이인 화산을 만들어 불꽃을 위로 쏘아 올리는 방식이다. 하지만 사찰·민가는 한지 위에 소금·향·숯을 넣고 이를 돌돌 말아 장대 위에 높이 매단 후 태운다. 이때 불꽃이 탁탁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러한 모습을 반영하여 명칭도 ‘바라볼 관(觀)’에서 ‘떨어질 낙(落)’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찰과 민간의 낙화는 국가·왕실이 주도했던 것과 달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재앙을 막고 액운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충분히 대중적 관심을 모으며 전승되었다. 낙화의 설행 방식은 사찰과 민가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의례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았던 민가에서는 낙화를 놀이로 승화시켰다.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함안 낙화놀이’ ‘무주안성 낙화놀이’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사찰에서는 ‘수구다라니(隨求陀羅尼)’ 신앙을 결합시켜 불교 의례로서의 성격을 강화했다. 수구다라니 신앙에는 큰 불덩어리를 부처님의 지혜 광명으로 묘사하고 이를 관(觀)하면 고난과 재난이 소멸한다고 본다.[2]정주연(2021. 2. 26.), 「연등회 대미 장식했던 ‘낙화법’ 기원 찾았다」,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 또한 사찰의 낙화 방식은 민간의 낙화와는 달리 심지에 진언이나 시주자의 이름 등을 써서 숯 봉지를 만든다. 또한 민간보다 낙화 봉이 더 굵고 오래 탄다. 숯 봉지를 꼬아 엮는 개수도 불교 전통 법수(法數)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도 특징이다. 현행 불교 낙화의식 소개 낙화의식의 불교신앙적 흔적은 세종 영평사 소장 『오대진언집(五大眞言集)』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적어도 17세기 이후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의례집에는 낙화법 절차를 소개하는 묵서가 있다. 의식에 필요한 재료, 범어(梵語)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글자인 실담자(悉曇字), 태우는 법이 차례로 나뉘어 적혀 있다. 이는 낙화가 단순히 즐기는 놀이가 아니라 경전에 근거한 수행법이자 신앙 의례였음을 의미한다.[3]이선이(2020), 「불교의례 낙화법의 기원과 형성과정 연구」, 『남도문화연구』 41, 순천: 남도문화연구소,, 208-210쪽. 세종시 영평사에서는 불교의식으로서의 낙화법을 재현하고 이를 계승하고자 봄철 부처님오신날과 가을 영평사 낙화축제를 통해 전통 불교식 낙화의식을 선보이고 있다.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세종호수공원 무대섬 다리 양쪽에 3만여 개의 낙화를 설치하여 저녁이 오면 바람에 휘날리는 불꽃의 장관에 빠져들게 한다. 행사를 시작하기 전, 참여객들은 소원지에 자신의 바람을 적어 낙화봉에 넣어 의식에 동참한다. 이와 동시에 행사장 곳곳에서는 축제적 신명이 이어지는데, 여명 취타대의 공연을 시작으로 송파산대놀이와 국악, 팝핀 공연 등이 펼쳐진다. 영평사 주지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현재의 낙화의식은 50여 년 전 평양에서 월남하신 노장스님이 전한 방법으로 전수되고 있으며, 해방 이후 단절 없이 이 의례를 봉행해 오고 있다고 한다. 영평사 낙화의식은 사찰 소장 『오대진언집』의 묵서 기록으로 역사성을 갖추는 한편, 현재에도 유일하게 불교계에서 연례행사로 낙화의식을 행하고 있어 불교 무형문화유산의 전승과 보전의 차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불교 전통 낙화의식의 의미 국내 각지에서 줄불놀이, 낙화놀이 등 민속놀이의 하나로 간주되는 낙화놀이는 사찰에서 여러 재난과 악업을 소멸하기 위해 봉행되던 불교의식에서 유래했다. 낙화에서 흩날리는 불꽃들은 보는 이들에겐 악업의 소멸과 재난의 정화를, 사찰 측은 도량 정화와 더불어 화재 액막이의 의미가 있다.
〈그림 2〉 부처님오신날 사찰 낙화축제(영평사, 2022)(불교신문)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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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1 당시 총독부 촉탁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이 촬영한 사진으로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朝鮮の習俗』(1925, 68쪽)에 실려 있다고 한다. 이선이(2020), 「불교의례 낙화법의 기원과 형성과정 연구」, 『남도문화연구』 41, 순천: 남도문화연구소, 215쪽.
  • 주석 2 정주연(2021. 2. 26.), 「연등회 대미 장식했던 ‘낙화법’ 기원 찾았다」,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
  • 주석 3 이선이(2020), 「불교의례 낙화법의 기원과 형성과정 연구」, 『남도문화연구』 41, 순천: 남도문화연구소,, 208-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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