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 오던 우란분절은 개화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불교계 침체도 겪지만, 이미 세시풍속으로 자리매김하여 지속적으로 설행된다. 이 과정에서 우란분절의 천도 대상이 7대 부모에 한정되지 않고, 무주고혼(無主孤魂)이나 순국열사 등으로 확대되어 합동천도재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에 발행된 신문과 잡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서울 시내 동문 밖 사찰에 수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우란분절이 설행되었다.[1]『황성신문』 1910년 8월 21일(음력 1910년 7월 17일) 2면. “風聲鶴唳 日前中元日에 東門外寺刹에 數千觀光人이 會集야 盂蘭盆을 叅觀얏고 再昨日大漢門前某家에 城內各麵商이 會同야 營業上會議를 開얏 在京城日本人等은 此에 對야 何等疑點이 發生엿던지 鍾路附近에 在 日人中에 或家產을 撤야 移轉 者가 有얏다더라”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나서 세시풍속을 금하는 시책에 따라 변화를 겪는다. 1918년 평양 창전리에 소재한 유점사(楡岾寺) 포교당에서 7월 15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신도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우란분회식이 설행되는데, 불공(佛供)과 목련 강연을 진행하였다.[2]『매일신보』 1918년 8월 25일 4면.
〈그림 1〉 『황성신문』 1910년 8월 21일(皇城新聞社)
〈그림 2〉 『매일신보』
1918년 8월 25일(每日申報社)
1923년 동아일보 사설에서는 “칠월백종(七月白踵)은 일년(一年)도 임의 반(半)을 과(過)하고 농역(農役)도 거의 필(畢)하였으며 우란분이라 하여 선조의 영(靈)과 모든 무주고혼(無主孤魂)의 제도(濟度)를 비는 날”이라고 우란분을 설명하며, 설, 대보름, 단오, 추석과 함께 일제 식민지 중 부흥해야 할 명절로 꼽고 있다.[3]『동아일보』 1923년 9월 26일 1면. 이 기사의 내용에서 우란분절을 ‘백종(白踵)’으로 표현한 점에서 불교적 성격이 아닌 민간 세시적 성격이 보인다. 또한 우란분절의 대상에서 무주고혼의 용어가 등장하는 점이 주목된다. 1935년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포교당에서 설행된 우란분절의 기사에서도 그 대상이 무주고혼이라 보도하고 있다.[4]『매일신보』 1935년 8월 18일. “安東西部布敎堂 盂蘭盆薺盛況” 이는 설행 대상이 재자(齋者)의 선망조상에서 불특정 다수의 고혼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림 3〉 『동아일보』 1923년 9월 26일(東亞日報)
〈그림 4〉 『매일신보』
1935년 8월 18일(每日申報社)
근대의 우란분절은 재와 함께 우란분에 관한 강연이 열리기도 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1929년 우란분절 전날인 8월 18일(음력 7월 14일) 일요일에 각황사(覺皇寺, 지금의 조계사)에서 ‘우란분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김태흡(金泰洽, 1899~1989)의 강연이 행해졌으며,[5]『동아일보』 1929년 8월 18일 5면. “佛敎日曜講演: 孟蘭益에 對하야(金泰洽)” 1934년에는 우란분절 이틀 후인 8월 26일(음력 7월 17일)에 향상회관(向上會館)에서 같은 제목으로 이지광(李智光)의 강연이 행해졌다.[6]『동아일보』 1934년 8월 26일 2면. “向上會館; 盂蘭盆에 對하여(李智光)”
〈그림 5〉 『동아일보』 1929년 8월 18일(東亞日報)
〈그림 6〉 『동아일보』 1934년 8월 26일(東亞日報)
1920년대 불교언론지에서는 우란분절에 대해 언급하며, 과거와 현생의 부모뿐만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돕는 현세 사회사업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으로 1927년 각황사에서는 우란분절 때 백여 명의 걸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7]『동아일보』 1927년 8월 11일 2면. “盂蘭盆會 覺皇寺에서 걸인에게 밥을 주워, 긔념강연도 개최, 人生의 意義와 佛敎의 精神(金泰洽)”
〈그림 7〉 『동아일보』 1927년 8월 11일(東亞日報)
또한 우란분절 전후로 3일을 포함해서 일주일 동안 각황사에서 『지장경(地藏經)』을 설법하고 지장예참정진을 했다.[8]『불교』28호 1926년 10월 “盂蘭盆과地藏精進 朝鮮佛敎中央敎務院에서는 舊七月十五日即蘭盂盆法會를奉行하기爲하야 盂蘭盆의 前後三日即七日間을 覺皇敎堂에서地藏經說法ㆍ及地藏禮懺精進을行하엿더라” 같은 시기의 기사에서 우란분절 때 천일기도를 회향하는 예도 있다.[9]『불교』28호 1926년 10월 “千日祈禱囘向 李蓮應大禪師의願力下에 多數한善信男女의同叅을엇어서 鐵原郡寶盖山石窟庵에서千日祈禱를行함은世人의共知아니라 本誌에도累載한바어니와 아모魔障업시千日의祈禱를 圓滿히마치고陰七月十五日即盂蘭盆日로써 囘向法要를執行하엿다더라(鐵原)” 이로써 당시 우란분절 신행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는 오늘날 각 사찰에서 다양하게 우란분절을 설행하는 모습와 유사하다.
1926년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항에 있는 정토종 북선불교(北鮮佛敎) 포교소에서 성대하게 거행한 우란분절의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우란분절을 설행했는데, 반야용선(般若龍船)을 분장하여 차, 과일, 향, 쌀을 가득 싣고 우란분절 날 밤에 해상에 띄워 수중고혼을 달래었다.[10]『불교』28호 1926년 10월 “北鮮과盂蘭盆 成北慶興郡雄基港에잇는 淨土宗北鮮佛敎布敎所에는 信의發起로 盂蘭盆會를盛大히 擧行하엿는데 般若龍船을扮粧하야 茶, 果, 資, 味를滿載하고 十五日夜에는海上에浮하야 海中孤魂을普饋함으로 環睹者가人山人海가되야 寂寞하던北鮮佛敎에一大獅子吼를지엇다고(雄基)”
〈그림 8〉 『불교』제28호(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1927년 금강산 유점사에서도 우란분절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오전 5시에 고혼천도식을 시작으로, 오전 7시부터는 금강서화전람회(金剛書畵展覽會)라는 전시회를 개최했다는 점이 특이하다.[11]『불교』39호 1927년 9월. “七月十五日과楡岾寺 金剛山楡岾寺에서去陰七月十五日盂蘭盆齋禮式을盛大히擧行하얏는데午前五時頃에는鄭重莊嚴한孤魂薦度式이잇섯고午前七時부티는專門講院四集班主催、靑年會後援으로金剛書畵展覽會를開催하얏데少年少女의作品一百三十餘種의書、畵、作文이千紫萬紅으로出品되야水月堂內에陳列하얏스니此가第一舘이며同寺事務所에保管한古物希有한珍奇品陳列塲을特公開하야一般의觀覽에供하니此가第二館이며金剛佛敎靑年會의經營에屬한圖書舘을第三舘으로하야來賓의縱覽에應하얏슴으로內外國人僧俗兼하야二百五十名以上의叅觀人이잇섯다는데洞口에서三十里以上의山頂에잇는分數로는매우盛况을呈함이라하며同日夜間에는七時붓터翌日上午一時지金剛佛敎靑年會의主催로「决心의勝利」란悲絶慘絶快絶한素人劇을演行하얏는데間間이獨唱合唱스音樂等을兼奏하야三百觀衆의無限한興味를니르켜希有大盛况을極하엿다더라(榆岾)”
〈그림 9〉 『불교』제39호(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1940년에는 우란분절 법요식을 라디오로 방송하기도 했다.[12]『불교시보』 61호 1940년 8월. 이처럼 대규모의 전시를 우란분절에 개막하고, 우란분절 법요식을 중앙 방송에서 송출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우란분절에 대한 인식과 신앙, 그리고 습속을 보여준다.
〈그림 10〉 『불교시보』 제61호(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해방 직후의 우란분절을 살펴보면, 1946년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조계사)에서는 순국열사위령 우란분대법요가 열린다.[13]『자유신문』 1946년 7월 27일 2면. “순국열사 위령 盂蘭盆大法 要” 이는 천도 대상이 7대 부모에 한정되지 않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목숨을 잃은 순국열사로 확대된 것을 통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우란분절도 설행 대상과 양상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14]최유진(2016), 「한.중 우란분재의 역사적 전개와 연희양상」, 서울: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31-34쪽.
〈그림 11〉 『자유신문』
(自由新聞)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황성신문』 1910년 8월 21일(음력 1910년 7월 17일) 2면. “風聲鶴唳 日前中元日에 東門外寺刹에 數千觀光人이 會集야 盂蘭盆을 叅觀얏고 再昨日大漢門前某家에 城內各麵商이 會同야 營業上會議를 開얏 在京城日本人等은 此에 對야 何等疑點이 發生엿던지 鍾路附近에 在 日人中에 或家產을 撤야 移轉 者가 有얏다더라”
- 주석 2 『매일신보』 1918년 8월 25일 4면.
- 주석 3 『동아일보』 1923년 9월 26일 1면.
- 주석 4 『매일신보』 1935년 8월 18일. “安東西部布敎堂 盂蘭盆薺盛況”
- 주석 5 『동아일보』 1929년 8월 18일 5면. “佛敎日曜講演: 孟蘭益에 對하야(金泰洽)”
- 주석 6 『동아일보』 1934년 8월 26일 2면. “向上會館; 盂蘭盆에 對하여(李智光)”
- 주석 7 『동아일보』 1927년 8월 11일 2면. “盂蘭盆會 覺皇寺에서 걸인에게 밥을 주워, 긔념강연도 개최, 人生의 意義와 佛敎의 精神(金泰洽)”
- 주석 8 『불교』28호 1926년 10월 “盂蘭盆과地藏精進 朝鮮佛敎中央敎務院에서는 舊七月十五日即蘭盂盆法會를奉行하기爲하야 盂蘭盆의 前後三日即七日間을 覺皇敎堂에서地藏經說法ㆍ及地藏禮懺精進을行하엿더라”
- 주석 9 『불교』28호 1926년 10월 “千日祈禱囘向 李蓮應大禪師의願力下에 多數한善信男女의同叅을엇어서 鐵原郡寶盖山石窟庵에서千日祈禱를行함은世人의共知아니라 本誌에도累載한바어니와 아모魔障업시千日의祈禱를 圓滿히마치고陰七月十五日即盂蘭盆日로써 囘向法要를執行하엿다더라(鐵原)”
- 주석 10 『불교』28호 1926년 10월 “北鮮과盂蘭盆 成北慶興郡雄基港에잇는 淨土宗北鮮佛敎布敎所에는 信의發起로 盂蘭盆會를盛大히 擧行하엿는데 般若龍船을扮粧하야 茶, 果, 資, 味를滿載하고 十五日夜에는海上에浮하야 海中孤魂을普饋함으로 環睹者가人山人海가되야 寂寞하던北鮮佛敎에一大獅子吼를지엇다고(雄基)”
- 주석 11 『불교』39호 1927년 9월. “七月十五日과楡岾寺 金剛山楡岾寺에서去陰七月十五日盂蘭盆齋禮式을盛大히擧行하얏는데午前五時頃에는鄭重莊嚴한孤魂薦度式이잇섯고午前七時부티는專門講院四集班主催、靑年會後援으로金剛書畵展覽會를開催하얏데少年少女의作品一百三十餘種의書、畵、作文이千紫萬紅으로出品되야水月堂內에陳列하얏스니此가第一舘이며同寺事務所에保管한古物希有한珍奇品陳列塲을特公開하야一般의觀覽에供하니此가第二館이며金剛佛敎靑年會의經營에屬한圖書舘을第三舘으로하야來賓의縱覽에應하얏슴으로內外國人僧俗兼하야二百五十名以上의叅觀人이잇섯다는데洞口에서三十里以上의山頂에잇는分數로는매우盛况을呈함이라하며同日夜間에는七時붓터翌日上午一時지金剛佛敎靑年會의主催로「决心의勝利」란悲絶慘絶快絶한素人劇을演行하얏는데間間이獨唱合唱스音樂等을兼奏하야三百觀衆의無限한興味를니르켜希有大盛况을極하엿다더라(榆岾)”
- 주석 12 『불교시보』 61호 1940년 8월.
- 주석 13 『자유신문』 1946년 7월 27일 2면. “순국열사 위령 盂蘭盆大法 要”
- 주석 14 최유진(2016), 「한.중 우란분재의 역사적 전개와 연희양상」, 서울: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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