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성황을 이룬 우란분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억불 정책으로 인해 음성화되었다. 그러나 효행(孝行) 윤리를 주축으로 하는 우란분재는 민중들에게 깊이 뿌리 내릴 수 있었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1]오현화(2002), 「불교축제로서의 우란분재」, 『어문학교육』24, 부산: 한국어문교육학회, 225쪽.
조선시대 초기에는 우란분재가 성행했음을 여러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태조대에 흥천사(興天寺)에서 우란분재를 베풀었으며[2]『태조실록』권14, 태조 7년(1398) 7월14일 정해 조, “設盂蘭盆齋于興天寺” 세조대에도 우란분재를 설행한 기록이 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승도(僧徒)가 초혼(招魂)한다고 핑계하고 도성인(都城人) 부녀(婦女)를 길거리에서 모으니, 저들이 천망(薦亡)하기 위하여 재(齋)를 베푼다면 마땅히 깨끗한 집으로 갈 것이지, 어찌 반드시 길거리에서 하겠습니까? 청컨대 금단(禁斷)을 가(加)하여 뒤의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막아 금지하는 일은 승정원에서 양종(兩宗)의 승려들을 불러서 말하도록 하고, 뒤에도 이와같이 하는 자가 있거든 헌부(憲府)에서 마땅히 그 가장(家長)을 중한 죄로 논하도록 하라. 그 막아 금지하는 사목(事目)은 다시 품명(稟命)하여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3]『세조실록』권13, 세조 4년(1458) 7월 16일 신축 조, “司憲府啓 "今僧徒托以招魂 聚都人婦女於街衢 彼爲薦亡而設 則當歸淨舍 何必街巷乎! 請加禁斷 以杜後弊" 傳曰 "防禁事 承政院招兩宗僧敎之 後有如此者 憲府當重論家長 其防禁之目 更稟命立之”
위 기록에서 스님들의 초혼(招魂) 행위를 언급한 점,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주청한 날짜가 7월 16일이라는 점 등으로 보아 우란분절과 관련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4]김상영(2009), 「우란분재의 의미와 設行 역사」, 『불교학연구』22, 김포: 불교학연구회, 212쪽. 또한 세조는 불교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유신들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우란분절 제의를 도심에서 사원 내에서만 베풀도록 촉구할 뿐 별반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5]오현화(2002), 「불교축제로서의 우란분재」, 『어문학교육』24, 부산: 한국어문교육학회, 226쪽.
우란분절은 15세기 성종대에도 성행했으며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7월 15일은 속칭 백종(百種)이라 하여 승가에서 백 가지 꽃 열매를 모아 우란분을 베풀었는데, 서울에 있는 여승의 암자에서 더욱 심하였으므로 부녀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곡식을 바치고는 돌아가신 어버이의 영혼을 불러 제사 지냈다.[6]『용재총화』권2(1525) “七月十五日俗呼爲百種 僧家聚百種花果 設盂蘭盆 京中尼社尤甚 婦女坌集 納米穀唱亡親之靈而祭之”
조선 중후기의 상황은 이식(李植, 1584-1647)의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과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志)』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7월 15일을 중원이라 한다. 이 설이 본래 도교와 불교의 책에서 나왔기 때문에, 승니와 도속이 모두 이를 중시하여, 우란분재와 초제(醮祭)와 송경(誦經)을 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승가에서 모두 이날에 재를 올려 선조의 혼백을 위로하는데 민간 백성들은 이를 많이 본받고 있으나, 사대부의 집안에서는 이런 일을 행하지 않고 단지 보름날이기 때문에 예법에 따라 선조의 사당에 전(奠)을 올릴 뿐이다.[7]『택당선생별집』권1「국서」
속칭 백종절(百種節)에 서울 사람들은 이날 음식을 장만하여 산에 올라가서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논다. 『우란분경』에 의하면, 이날 목련비구가 7월 15일에 백 가지 음식과 다섯 가지 과일을 쟁반에다 갖추어서 시방대덕을 공양했다고 했다. 백종이란 백 가지 음식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는 부처를 숭상해서 우란분회를 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단지 술을 마시고 음식을 마음껏 먹으며 흥겹게 놀 뿐이다. 혹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옛 풍속에 이날 백 가지 곡식의 씨를 진열하였으므로 백종이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아무 근거가 없는 설이다.[8]『경도잡지』「중원」 “俗稱百種節 都人盛設饌 登山歌舞爲樂 按盂蘭盆經 目蓮比丘 七月十五日具百味五果 以著盆中 供養十方大德 今所云 百種 卽百味之謂也 高麗崇佛爲盂蘭盆會 今俗 只醉飽而已 或云 是日 舊俗 陳列百穀之種 故曰 百種 無稽之說也”
위 기록들을 통해 우란분절은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민중들의 제의로 완전히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우란분절은 지배세력의 억압과 민중의례와의 습합 과정을 통해 민중 중심의 민간제의나 민속놀이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9]김상영(2009), 「우란분재의 의미와 設行 역사」, 『불교학연구』22, 김포: 불교학연구회, 201-215쪽.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오현화(2002), 「불교축제로서의 우란분재」, 『어문학교육』24, 부산: 한국어문교육학회, 225쪽.
- 주석 2 『태조실록』권14, 태조 7년(1398) 7월14일 정해 조, “設盂蘭盆齋于興天寺”
- 주석 3 『세조실록』권13, 세조 4년(1458) 7월 16일 신축 조, “司憲府啓 "今僧徒托以招魂 聚都人婦女於街衢 彼爲薦亡而設 則當歸淨舍 何必街巷乎! 請加禁斷 以杜後弊" 傳曰 "防禁事 承政院招兩宗僧敎之 後有如此者 憲府當重論家長 其防禁之目 更稟命立之”
- 주석 4 김상영(2009), 「우란분재의 의미와 設行 역사」, 『불교학연구』22, 김포: 불교학연구회, 212쪽.
- 주석 5 오현화(2002), 「불교축제로서의 우란분재」, 『어문학교육』24, 부산: 한국어문교육학회, 226쪽.
- 주석 6 『용재총화』권2(1525) “七月十五日俗呼爲百種 僧家聚百種花果 設盂蘭盆 京中尼社尤甚 婦女坌集 納米穀唱亡親之靈而祭之”
- 주석 7 『택당선생별집』권1「국서」
- 주석 8 『경도잡지』「중원」 “俗稱百種節 都人盛設饌 登山歌舞爲樂 按盂蘭盆經 目蓮比丘 七月十五日具百味五果 以著盆中 供養十方大德 今所云 百種 卽百味之謂也 高麗崇佛爲盂蘭盆會 今俗 只醉飽而已 或云 是日 舊俗 陳列百穀之種 故曰 百種 無稽之說也”
- 주석 9 김상영(2009), 「우란분재의 의미와 設行 역사」, 『불교학연구』22, 김포: 불교학연구회, 201-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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