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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우란분절

우리나라의 우란분재 설행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예종(睿宗) 원년 7월 조(1106)이다.
계묘일에 장령전에서 우란분재를 올려 숙종의 명복을 빌고 갑진일에 또 명망있는 승려를 불러 『목련경』을 강의하였다.[1]『고려사』 세가12 예종 1년 추7월 계묘 조, “癸卯 設盂蘭盆齋于長齡殿 以薦肅宗冥祐福 甲辰 又召名僧 講目連經”
당시 행해진 우란분재는 예종(睿宗)이 장령전(長齡殿)에서 숙종(肅宗)의 명복과 천도를 빌기 위해 베풀어졌다. 이는 우란분재가 지니고 있는 재(齋)의 성격에 부합한다. 또한 우란분재를 봉행한 다음 날 명승(名僧)을 초청하여 『목련경(目蓮經)』을 강설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고려 사회에서 『목련경』이 우란분재 설행시 핵심 경전이었다는 사실까지도 알 수 있다. 한편, 의천(義天)『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 실려 있는 자료를 통해 우란분재 최초 기록인 1106년 이전 고려 사회에서 행해졌던 우란분재의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의천의 『대각국사문집』 「난분일소비발원소(蘭盆日燒臂發願疏)」에서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의천이 우란분일에 연비를 하며 송나라로 유학하기를 부처님께 발원하는 구절이 있다.
삼가 생각하건대, 『범망경』에 법을 중히 여기는 규범을 드리워 팔을 태우는 것을 먼저 가르치셨고, 『능엄경』에 빚을 갚는 모범을 말씀하시어 몸을 태우는 것을 간곡히 보이셨으니, 하물며 부모의 노고에 어찌 정성으로 간절한 슬픔을 다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아무개는 다행히 천년에 한 번 만나기 힘든 법을 만났고, 또한 일승의 업을 오로지 하였으며, 오묘한 도가 사람에 있다 하여 비록 마음에 새긴 지 오래이나 그윽한 진리의 말은 조짐이 끊기었으니, 어찌 얼굴을 담에 대고 도를 알지 못한 채 오래도록 지내겠습니까? 여러 번 송나라에 유학하여 도를 구하고자 했지만 매번 장애가 있어 죄업의 허물이 깊이 얽혀 있음을 깊이 탄식하였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함을 슬퍼할 따름이었습니다. 만일 불보살의 돌보심과 가호가 아니면 어찌 법을 구해 오려는 저의 평소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겠으며 공덕을 본받는 일을 안으로 베풀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지극한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석가세존을 비롯한 여러 성스러운 대중들께서는 자비를 버리지 마시고 가련한 마음으로 한 줄기 향을 팔에 태우는(燒臂) 작은 정성을 거두어 주소서. 오늘의 좋은 인연을 의지해서 몸소 일백 성(城)을 두루 돌며 다른 날 스승을 기이하게 만났던 선재동자의 구법행을 본받게 하소서. 바람이 그치면 다시 부채질을 하듯, 법 비(法雨)가 그쳤지만 다시 비를 내려 원종(圓宗)을 길이 퍼지게 하시고 이로써 마침내 온전한 효도를 이루게 하소서.[2]의천, 『대각국사문집』권15 「난분일소비발원소」, “右伏以 梵網垂重法之規 先敎燒臂 楞嚴談酬債之範 曲示熱身 矧惟父母之劬勞 盍罄精神之哀懇 某運逢千載 業檀一乘 妙道在人 雖刳心而斯久 玄言絶朕 奈墻面以居多 屢欲遊叅 每看障碍 嘆罪愆之深結 悲敎法之下衰 若匪冥加 豈諧素願 敢効功於內施 竊扣應於克誠 伏乞本師世尊爲首多諸聖衆等 不捨慈悲 哀憐納受 願使臂燒一炷 賴今日之良因 躬歷百城 遂他年之奇遇 眞風息而復扇 法雨收而更䨦 永播圓宗 終成全孝 某歸命激切之至”
의천은 1085년 4월 유학길에 나섰으며, 그로부터 14개월 후인 1086년 6월경 귀국했다. 따라서 이 글은 의천의 송나라 유학이 성사되었던 1085년 4월 이전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그의 문집에는 『우란분경』을 강설하면서 남긴 「강난분경발사(講蘭盆經發辭)」에서 효의 성격과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큰 자비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없고 큰 효도는 친애하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사랑하는 것만 사랑하고 남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으면 큰 자비가 아니며, 현재의 부모만 친애하고 옛날에 친애했던 부모를 친애하지 않으면 큰 효도가 아니다 … 그러므로 우리의 본사이신 대각 세존께서는 처음 정각을 이루었을 적에 숙세(宿世)에 근기가 성숙한 큰 보살들을 위하여 처음 14일 동안 화엄대교의 근본이 되는 법문을 하시고 바로 범망보살대계를 설하시며 이르시기를, “부모와 스승과 삼보에 효순(孝順)하고 지극한 법에 효순해야 하는 효를 곧 계(戒)라 한다”하시고 열 가지 무거운 계와 48가지 가벼운 계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성품의 큰 계(性戒)이며 효의 극진함이다. 만일 중생의 소질과 근기의 마땅함에 따라 순응하고 말세에 빛을 펴려면 이 『우란분경』이 참으로 중요할 것이다. 목련존자로 인하여 이 경을 설하는 인연이 일어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를 선양하셨으니, 자자(自恣)하는 승려들을 청해 수고한 은혜를 갚고자 많은 음식을 공양함에 십지보살이 이에 응하였으니 그 덕이 크고 넓어서 선정과 지혜를 닦아 두 가지 장애를 없앤 이익이 넓고 큰지라, 가히 미혹을 깨뜨리는 앞의 진영(陣營)이요 도에 들어가는 요긴한 관문이라 할 것이다.[3]의천, 『대각국사문집』권3 「강난분경발사」, “大慈無不愛 大孝無不親 愛我之愛不愛彼之所愛 非大慈也 親今之親 不親昔之所親 非大孝也 … 故我本師大覺世尊 初成正覺 爲 宿世根熟 大菩薩衆 於第二七日 轉花嚴大敎根法輪 便說梵網 菩薩大戒云 孝順父母 師僧三寶 孝順至道之法 孝名爲戒 乃至廣說 十重四十八輕者 此是稱性大戒 孝之極也 若乃曲順機冝 流光末葉者 今此蘭盆 實爲其要 因目連而起發故 大覺以宣揚 請自恣僧報劬勞德 供饌具而十地應 其德汪洋 定慧修而二障除 其利浩慱 可謂 破迷前陣 入道要門”
이는 『우란분경』에 실려 있는 내용을 부연한 것으로, 유교 못지않게 불교에서도 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우란분경』을 ‘미혹을 깨뜨리는 앞의 진영(陣營)이요, 도에 들어가는 요긴한 관문이다[破迷前陣 入道要門]’라고 표현할 정도로 『우란분경』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의천이 고려에서 지니고 있었던 비중을 감안할 때, 『우란분경』을 중시했던 이러한 태도는 고려중기 불교계와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사』에는 우란분재 설행에 대한 기록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우란분재가 자주 설해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예종 4년(1109) 무오일에 우란분도량(盂蘭盆道場)을 장령전(長齡殿)에 설치하였다.[4]『고려사』 세가13, 예종 4년 7월 무오 조, “戊午 設盂蘭盆道場於長齡殿” 의종 7년(1153) 임인일에 봉원전에서 우란분재를 올렸다.[5]『고려사』 세가18, 의종 7년 7월 병신 조, “還新闕 壬寅 設盂蘭盆齋於奉元殿” 충렬왕 11년(1285) 계미일에 왕이 신효사에 가서 우란재를 베풀었다.[6]『고려사』 세가30, 충렬왕 11년 7월 계미 조, “癸未 幸神孝寺 設盂蘭齋” 충렬왕 22년(1296) 신사일에 왕과 공주가 광명사에 가서 우란분재를 베풀었다.[7]『고려사』 세가31, 충렬왕 22년 7월 신사 조, “辛巳 王與公主 幸廣明寺 設盂蘭盆齋” 충선왕 1년(1308) 기해일에 왕과 공주가 신효사에 가서 우란분재를 베풀었다.[8]『고려사』 세가33, 충선왕 1년 7월 기해 조, “己亥 王與公主 幸神孝寺 設盂蘭盆齋” 공민왕 5년(1356) 계사일에 내전에 우란분재를 차렸다.[9]『고려사』 세가39, 공민왕 5년 7월 계사 조, “癸巳 設盂蘭盆齋于內殿”
위에서 열거한 우란분재 설행 기록은 국왕이 직접 주관하였던 성격의 행사이다. 사찰이 아닌 궁에서도 설행되었다는 사실은 우란분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였음을 보여준다. 『고려사』 등의 사서 이외 자료에서는 우란분재와 관련한 내용은 잘 보이지 않지만, 고려 말 이색(李穡, 1328-1396)이 남긴 글을 통해 고려후기 우란분재의 설행과 관련한 일부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다음은 이색이 남긴 시문이다.
「아침에 비가 오다[朝雨]」[10]이색, 『목은시고』권24, 詩,「朝雨」 절집마다 모두 우란분회를 베푸니[盂蘭盆會遍僧家] 신도들은 떼지어 왁자지껄 담소하는데[檀越成群笑語譁] 난 홀로 연잎 밟은 원통을 마주하다[獨對圓通躡蓮葉] 문득 광제사로부터 법화를 빌려왔네[却從廣濟借荷花] 뜬구름은 바람 따라 광대히 움직이고[浮雲浩浩隨風轉] 가랑비는 햇살을 띠고 실실 내리누나[小雨絲絲帶日斜] 지난 허물 깨끗이 씻어 매우 청정하거니[滌盡往愆淸淨甚] 어찌 고통 참고 산수와 짝할 것 있으랴[何須忍苦伴煙霞]
시 「조우(朝雨)」에서는 고려후기 우란분회를 행하는 사찰의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이색은 당시 대부분의 사찰에서 우란분회가 행해지고 있으며[遍僧家], 우란분회에 참석한 신도들은 무리를 이루어 서로 웃으며 왁자지껄 담소를 나누고 있다고[笑語譁] 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에 우란분재가 매우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시구이다. 또한 제7구(句)에서 “지난 허물 깨끗이 씻어 매우 청정하거니[滌盡往愆淸淨甚]”라는 표현이 있다. 이 부분은 우란분재의 기원에 해당하는 자자일(自恣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7월 보름의 일을 기록하며 감회에 젖다[孟秋望日記事有感)]」[11]이색, 『목은시고』권35, 驪興吟, 「孟秋望日記事有感」 우란분의 법회는 서역에서 나왔나니[盂蘭盆法出西天] 진단의 번역은 도현이라 하나니라[震旦飜爲解倒懸] 온 나라가 뒤질세라 분주히 치달리는 때에[擧國奔馳唯恐後] 아직도 이 몸은 여전히 떠돌이라 부끄럽네[愧吾流落尙如前] 두 병에 꽂힌 꽃은 참으로 볼품없다마는[兩甁花蕊眞無幾] 한 가닥 향 연기는 대천 세계에 퍼지리라[一穟香烟徧大千] 다행히 조사당에 천신할 멥쌀을 얻어 와서[幸得祖堂新粳米] 나도 한낮에 백의선에게 절하고 올렸노라[日中拜獻白衣仙]
이색의 두 번째 시 「맹추망일기사유감(孟秋望日記事有感)」에서 “온 나라가 뒤질세라 분주히 치달리는 때에[擧國奔馳唯恐後]”라는 표현은 우란분재를 행하느라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즉 첫 번째 시의 내용과 함께 이 시기 우란분재가 매우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시구이다. 또한 “멥쌀을 구해 와 조사당에 공양하였다[幸得祖堂新粳米]”는 표현에서, 우란분재의 근본정신을 잘 계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타 불전(佛殿)이 아닌 조사당에 공양을 올리는 것은 자자일을 맞이한 수행 대중에게 공양을 올리는 의례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사』, 『대각국사문집』, 『목은시고』 등에서 전하는 내용을 통해 고려시대 우란분재가 왕실과 사찰 등에서 꾸준하게 설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고려의 우란분재는 효(孝)의 선양과 자자(自恣), 수행 스님들에 대한 공양 등 우란분재와 관련한 기본 정신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12]김상영(2009), 「우란분재의 의미와 設行 역사」, 『불교학연구』22, 김포: 불교학연구회, 190-200쪽.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고려사』 세가12 예종 1년 추7월 계묘 조, “癸卯 設盂蘭盆齋于長齡殿 以薦肅宗冥祐福 甲辰 又召名僧 講目連經”
  • 주석 2 의천, 『대각국사문집』권15 「난분일소비발원소」, “右伏以 梵網垂重法之規 先敎燒臂 楞嚴談酬債之範 曲示熱身 矧惟父母之劬勞 盍罄精神之哀懇 某運逢千載 業檀一乘 妙道在人 雖刳心而斯久 玄言絶朕 奈墻面以居多 屢欲遊叅 每看障碍 嘆罪愆之深結 悲敎法之下衰 若匪冥加 豈諧素願 敢効功於內施 竊扣應於克誠 伏乞本師世尊爲首多諸聖衆等 不捨慈悲 哀憐納受 願使臂燒一炷 賴今日之良因 躬歷百城 遂他年之奇遇 眞風息而復扇 法雨收而更䨦 永播圓宗 終成全孝 某歸命激切之至”
  • 주석 3 의천, 『대각국사문집』권3 「강난분경발사」, “大慈無不愛 大孝無不親 愛我之愛不愛彼之所愛 非大慈也 親今之親 不親昔之所親 非大孝也 … 故我本師大覺世尊 初成正覺 爲 宿世根熟 大菩薩衆 於第二七日 轉花嚴大敎根法輪 便說梵網 菩薩大戒云 孝順父母 師僧三寶 孝順至道之法 孝名爲戒 乃至廣說 十重四十八輕者 此是稱性大戒 孝之極也 若乃曲順機冝 流光末葉者 今此蘭盆 實爲其要 因目連而起發故 大覺以宣揚 請自恣僧報劬勞德 供饌具而十地應 其德汪洋 定慧修而二障除 其利浩慱 可謂 破迷前陣 入道要門”
  • 주석 4 『고려사』 세가13, 예종 4년 7월 무오 조, “戊午 設盂蘭盆道場於長齡殿”
  • 주석 5 『고려사』 세가18, 의종 7년 7월 병신 조, “還新闕 壬寅 設盂蘭盆齋於奉元殿”
  • 주석 6 『고려사』 세가30, 충렬왕 11년 7월 계미 조, “癸未 幸神孝寺 設盂蘭齋”
  • 주석 7 『고려사』 세가31, 충렬왕 22년 7월 신사 조, “辛巳 王與公主 幸廣明寺 設盂蘭盆齋”
  • 주석 8 『고려사』 세가33, 충선왕 1년 7월 기해 조, “己亥 王與公主 幸神孝寺 設盂蘭盆齋”
  • 주석 9 『고려사』 세가39, 공민왕 5년 7월 계사 조, “癸巳 設盂蘭盆齋于內殿”
  • 주석 10 이색, 『목은시고』권24, 詩,「朝雨」
  • 주석 11 이색, 『목은시고』권35, 驪興吟, 「孟秋望日記事有感」
  • 주석 12 김상영(2009), 「우란분재의 의미와 設行 역사」, 『불교학연구』22, 김포: 불교학연구회, 190-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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