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분절은 인도에 뿌리를 두면서 동아시아권 불교국에서 성행하여 불교신앙의 중심을 이루어 왔을 뿐만 아니라, 각국의 불교문화를 형성·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양(梁)나라 무제(武帝) 천감(天監) 15년(516)에 성립된 『경율이상(經律異相)』에 ‘목련이 어머니를 위해 우란분을 행했다’[1]『경율이상』권14(『大正藏』53, 73下), “目連爲母造盆”는 기록과, 양 무제 대동(大同) 4년(538)에 ‘양무제가 동태사(同泰寺)에 행차하여 우란분재를 베풀었다’[2]『불조통기』권37(『大正藏』49, 351上), “帝幸同泰寺設盂蘭盆齋”는 『불조통기(佛祖統紀)』의 기록으로 보아 이미 6세기경에 거국적 규모의 행사로 자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승려인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도 당대(唐代) 모든 절에서 우란분재가 7월 15일부터 7월 17일에 이르기까지 설행된 기록이 있다.[3]『입당구법순례행기』권3 개성 5년 7월 조, “諸寺盂蘭盆會十五日起首十七日罷” 이처럼 우란분재는 종교적 의례로만 한정되지 않고 민속행사로 정착되어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후 중국의 우란분절은 점차 도교적 의미가 강한 중원절(中元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현대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귀절(鬼節)’ 혹은 ‘칠월반(七月半)’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때부터 우란분재가 성행했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 의식이 행해진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 스이코(推古) 천황 14년(606)[4]『일본서기』권22, 추고천황 14년, “…自是年初 每寺 四月八日 七月十五日 設齋”, 사이메이(齊明) 천황 3년(657)에 우란분재를 설행했다는 기록[5]望月信亭(1956), 『佛敎大年表』, 京都 : 世界聖典刊行協會.이 있다. 이 시기를 우리나라와 대조해 보면 스이코 천황 14년은 신라 진평왕(眞平王) 28년, 사이메이 천황 3년은 신라 무열왕(武烈王) 3년에 해당된다.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던 당시 불교의 전파경로를 미루어 볼 때, 일본사에 기록된 불교 행사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우란분재가 설행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진평왕 35년 7월 조(613)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를 마련하고 원광(圓光) 등의 법사를 불러 불경을 강론하도록 했다[6]『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평왕 35년 7월 조. “秋七月 隋使王世儀至皇龍寺 設百高座 邀圓光等法師 說經”는 기록이 있다. 이는 칠석이나 우란분절을 즈음해 왕을 중심으로 국가차원의 대중법회가 실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란분재의 설행시기와 당대의 풍속을 고려한다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설행되었음이 유력하다.[7]오현화(2002), 「불교축제로서의 우란분재」, 『어문학교육』24, 부산: 한국어문교육학회, 219-220쪽.
이처럼 신라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리 잡은 우란분절은 불교가 번창했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왕실과 귀족층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급의 불교의례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불교의 위상이 격하된 조선시대에 와서는 지배층으로부터 외면받게 된다. 종교적 세시습속의 경우, 그 종교가 위력을 상실하였을 때 종교성은 퇴색되고 습속만이 민속 현상과 밀접히 융합되듯이, 우란분절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간 속으로 깊이 파고들게 된다.[8]구미래(2017), 「백중과 우란분재의 발생기원에 관한 연구」, 『비교민속학』25, 서울: 비교민속학회, 513쪽.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경율이상』권14(『大正藏』53, 73下), “目連爲母造盆”
- 주석 2 『불조통기』권37(『大正藏』49, 351上), “帝幸同泰寺設盂蘭盆齋”
- 주석 3 『입당구법순례행기』권3 개성 5년 7월 조, “諸寺盂蘭盆會十五日起首十七日罷”
- 주석 4 『일본서기』권22, 추고천황 14년, “…自是年初 每寺 四月八日 七月十五日 設齋”
- 주석 5 望月信亭(1956), 『佛敎大年表』, 京都 : 世界聖典刊行協會.
- 주석 6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평왕 35년 7월 조. “秋七月 隋使王世儀至皇龍寺 設百高座 邀圓光等法師 說經”
- 주석 7 오현화(2002), 「불교축제로서의 우란분재」, 『어문학교육』24, 부산: 한국어문교육학회, 219-220쪽.
- 주석 8 구미래(2017), 「백중과 우란분재의 발생기원에 관한 연구」, 『비교민속학』25, 서울: 비교민속학회, 5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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