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련사 생전예수재는 2022년 5월 20일에 경기도 무형문화재[1]제66호.로 지정되었다. 청련사 예수재는 서울·경기지역 범패의 전통과 어장 상진 스님의 한국적 염불조가 잘 어우러져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장엄염불과 축원화청 등에 나타나는 다채로운 북가락이 의례의 엄숙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예술성을 극대화 한다[2]윤소희(2018), 「청련사 어산상진 범음성 계보와 성음의 특징」, 『불교문예연구』 제11집, 서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화예술연구소, 64쪽.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청련사 예수재는 조선왕실과 양반층 의례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예수재 기록에 의하면 초기에는 왕실의 특정 인물에서 시작하여 점차 양반계층의 특정 인물이 의식의 주체로 변화한다.[3]이종수는 조선중후기에 간행된 예수재소문을 분석하여 당시의 설행 양상을 추론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예수재의 설행주체가 초기에는 왕실 구성원이었다가 차츰 일반 백성으로 옮아가고 있다. 허응보우와 기암법견의 소문에 ‘구중리(九重裏), ’단거구중(端居九重)‘이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왕실의 명을 받아 글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소문에서는 설행주체가 왕실이라고 특정할 소문은 보이지 않는다. …(중략)… 이는 16~17세기 초기의 예수재가 왕실 중심으로 설행되었던 것에 비해 18세기 이후 일반 백성 중심으로 설행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종수(2019), 「한국불교 예수재의 성립과 전승」, 『청련사 예수시왕재의 역사·문화적 의의(학술세미나 자료집)』, 양주: (재)천년고찰 청련사, 35쪽.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서는 설행주체가 합동 주체로 점차 대중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청련사에서 독설판 예수재가 활발히 설행되고 있는 사실은 청련사 예수재의 고형성과 전통성을 보여준다.
청련사 예수재의 특징으로는 ① 사중 승려들로 설행을 온전히 수행하고 있는 점, ②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장엄 요소들이 잘 전승되고 있는 점, ③ 보다 고형의 예수재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독설판이 활성화되어 있는 점, ④ 당풍 범패와 다른 한국적 율조를 가진 범패가 잘 드러나는 점 등[4]구미래(2019), 「청련사 예수시왕생칠재의 의례주체와 설행양상」, 『동국사학』 제66집, 서울: 동국역사문화연구소, 114~120쪽.을 들 수 있다.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제66호.
- 주석 2 윤소희(2018), 「청련사 어산상진 범음성 계보와 성음의 특징」, 『불교문예연구』 제11집, 서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화예술연구소, 64쪽.
- 주석 3 이종수는 조선중후기에 간행된 예수재소문을 분석하여 당시의 설행 양상을 추론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예수재의 설행주체가 초기에는 왕실 구성원이었다가 차츰 일반 백성으로 옮아가고 있다. 허응보우와 기암법견의 소문에 ‘구중리(九重裏), ’단거구중(端居九重)‘이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왕실의 명을 받아 글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소문에서는 설행주체가 왕실이라고 특정할 소문은 보이지 않는다. …(중략)… 이는 16~17세기 초기의 예수재가 왕실 중심으로 설행되었던 것에 비해 18세기 이후 일반 백성 중심으로 설행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종수(2019), 「한국불교 예수재의 성립과 전승」, 『청련사 예수시왕재의 역사·문화적 의의(학술세미나 자료집)』, 양주: (재)천년고찰 청련사, 35쪽.
- 주석 4 구미래(2019), 「청련사 예수시왕생칠재의 의례주체와 설행양상」, 『동국사학』 제66집, 서울: 동국역사문화연구소, 114~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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