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련사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개명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는 서울 하왕십리 종남산 무학봉 아래에 소재하였으나, 기존 자리에 아파트단지가 개발되면서 가람을 양주로 옮겨 2010년 중창하였다.[1]청련사의 양주 이전은 단순히 주변 지역 아파트 개발로 인한 결과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근본적으로 50여 년 이상 계속된 조계종, 태고종 간의 소유권 분쟁에서 비롯한 것이다. 과거 청련사는 조선 왕궁과 가까웠던 만큼 왕실의 원찰과 도성 비보사찰의 기능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청련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창건되어 안정사(安定寺, 安靜寺)로 불렸다. 이후 조선 태조 4년(1395) 왕사(王師) 무학대사가 쇠락한 가람을 중수하고 주석(駐錫)한 것으로 알려진다.[2]이종수(2018), 「양주 청련사의 역사적 변천과 위상」, 『불교문예연구』 제11집, 서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화예술연구소. 무학대사가 절을 중창한 이후 명칭을 청련사로 개칭하였으나 안정사라는 사명도 같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의 「경조오부(京兆五部)」 중앙 동남 방향에 ‘安定寺(안정사)’란 표기가 뚜렷하다. 최근까지도 청련사는 ‘안정사’라는 사명을 사용하다가 양주로 옮기면서 청련사로 정식 개칭하였다.
무학대사의 중창(重創) 이후, 청련사에서는 여러 차례의 건물 중건(重建)과 경전 판각 및 불화 조성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영조 41년(1765)에 지장경을 판각하여 약사전에 보관하였으며, 고종 14년(1880)과 21년(1887)에는 여러 전각의 후불탱화를 조성하고 칠성각을 중수하였다. 1924년에는 대방(大房)과 시왕전(十王殿)을 중창하고 1936년에는 괘불탱, 후불탱, 신중탱을 조성하였다.[3]이종수(2016), 「청련사사적비문」, 『백우대종사법어집』, 백우대종사법어집 편찬위원회, 양주: (재)천년고찰 청련사, 275-276쪽.
청련사는 경기도 지정 문화유산이 풍부한 사찰이다. 그 중 생전예수재(경기도 무형문화재 제66호)와 관련이 깊은 유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아미타불괘불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5호)
- 석조지장보살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4호)
- 지장시왕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1호)
- 시왕도 및 사자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6호)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청련사의 양주 이전은 단순히 주변 지역 아파트 개발로 인한 결과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근본적으로 50여 년 이상 계속된 조계종, 태고종 간의 소유권 분쟁에서 비롯한 것이다.
- 주석 2 이종수(2018), 「양주 청련사의 역사적 변천과 위상」, 『불교문예연구』 제11집, 서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화예술연구소.
- 주석 3 이종수(2016), 「청련사사적비문」, 『백우대종사법어집』, 백우대종사법어집 편찬위원회, 양주: (재)천년고찰 청련사, 275-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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