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청련사에서 생전예수재를 설행했을 가능성은 높지만[1]다음의 기사에서 당시 청련사(안정사)에서 초파일 대재를 설행했다고 하는 만큼, 재의식이 발달한 안정사이기에 생전예수재를 개최했을 가능성도 높다.(「안정사의 대재, 4월 4일 출발」, 《매일신보》3면, 1917.05.27.) 구체적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청련사 예수재의 근현대 설행은 1960년대부터 확인 가능하다. 청련사에 지금까지 주석하고 있는 스님들의 구술에 의하면 당시 청련사에서는 윤달이 드는 해마다 예수재를 치렀다고 한다.
출가해보니 우리 절에서는 영산재를 그렇게 많이 했습니다. 개인 사십구재로 하는 영산재를 엄청 많이…. 예수재는 그리 못하고, 윤달이 들었을 때 합동으로 했어요. 여럿이 비용을 만들어야 재 채비를 하는 거니까 윤달마다 하고…. 큰 재가 들면 우리 스님들이 다른 절에 가기도 하고, 다른 절 스님들 모시기도 하면서 그렇게[2]구미래(2019), 「청련사 예수시왕생칠재의 의례주체와 설행양상」, 『동국사학』 제66집, 서울: 동국역사문화연구소, 86쪽. 구술 해경스님(1942년생). 2018년 9월 17일 청련사 대적광전동 회의실에서 구미래 인터뷰.
이밖에 1970년대 초 예수재 설행을 마치고 네 명의 스님이 법당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3]해당 사진은 1970년대 초, 백우 종사(1958년 청련사 출가, 2010년 개명산 청련사 중창, 2015년 12월 입적)가 당시 생전예수재를 마친 후 기념으로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백우대종사법어집』(2016), 백우대종사법어집 편찬위원회, 양주: (재)천년고찰 청련사, 16쪽에 수록되어 있다., 1995년 윤8월 생전예수재 회향을 촬영한 동영상 자료[4]해당 동영상은 1995년, 사찰이 서울 왕십리에 있을 때 촬영된 것이다. 등이 청련사에 남아 있다. 이를 통해 60~70년대 청련사 생전예수재의 전승 양상은 뚜렷이 확인되는 바이다.
근래 청련사는 2010년부터 운영되어 오던 ‘청련사범음범패보존회’를 기반으로 2014년 ‘청련사예수시왕생칠재보존회’를 발족하여 생전예수재의 보존과 확산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5]청련사예수시왕보존회의 뛰어난 기량은 외부 사찰의 예수재 초빙 횟수로 증명되고 있다. 실제 윤달이 있던 2012, 2014, 2017년에 청련사보존회팀이 외부 사찰에 초빙되어 의례를 집전한 횟수가 69회나 된다. 한 해에 20회 넘게 타사찰의 의례를 진행한 셈이다. 또한 2017년부터는 윤달에만 설행하던 예수재를 매년 설행으로 바꾸는 한편, 생전예수재의 가치와 보전을 위한 학술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오고 있다. 청련사 예수재는 상주하는 승려들로 용상방을 구성, 외부 인원은 악사 정도만 초빙하고 나마지는 모두 사중 승려로 감당한다는 점이 남다른 가치를 지닌다.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다음의 기사에서 당시 청련사(안정사)에서 초파일 대재를 설행했다고 하는 만큼, 재의식이 발달한 안정사이기에 생전예수재를 개최했을 가능성도 높다.(「안정사의 대재, 4월 4일 출발」, 《매일신보》3면, 1917.05.27.)
- 주석 2 구미래(2019), 「청련사 예수시왕생칠재의 의례주체와 설행양상」, 『동국사학』 제66집, 서울: 동국역사문화연구소, 86쪽. 구술 해경스님(1942년생). 2018년 9월 17일 청련사 대적광전동 회의실에서 구미래 인터뷰.
- 주석 3 해당 사진은 1970년대 초, 백우 종사(1958년 청련사 출가, 2010년 개명산 청련사 중창, 2015년 12월 입적)가 당시 생전예수재를 마친 후 기념으로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백우대종사법어집』(2016), 백우대종사법어집 편찬위원회, 양주: (재)천년고찰 청련사, 16쪽에 수록되어 있다.
- 주석 4 해당 동영상은 1995년, 사찰이 서울 왕십리에 있을 때 촬영된 것이다.
- 주석 5 청련사예수시왕보존회의 뛰어난 기량은 외부 사찰의 예수재 초빙 횟수로 증명되고 있다. 실제 윤달이 있던 2012, 2014, 2017년에 청련사보존회팀이 외부 사찰에 초빙되어 의례를 집전한 횟수가 69회나 된다. 한 해에 20회 넘게 타사찰의 의례를 진행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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