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조선총독부는 사찰령 및 사찰령시행규칙을 발표․제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조선 불교계를 통제하기 위해 사찰의 재산권, 주지 임면권 등을 장악하였으며, 그 시행의 편의를 위해 30개의 본사와 그에 속한 말사의 형태로 전국 사찰을 구분하였다. 봉은사는 이 제도가 시행된 1911년부터 서울과 경기도 일원의 80여 사암을 관장하는 본사로 지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봉은사는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이었던 조선시대의 위상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수도권의 80여 사암을 대표하는 본사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1]대한불교 조계종 봉은사(1997), 『봉은사 사지』, 서울: 사찰문화연구원, 51-56쪽.
이 시기 봉은사를 언급하는 근현대 신문기사를 검토해 보면, ①전쟁으로 죽은 병사를 위한 초혼제[2]《매일신보》, 1914년 6월 12일, 〈봉은사의 장졸초혼제〉, ②봉은사수륙재의 성황[3]《매일신보》, 1914년 7월 12일, 〈봉은사수륙재의 성황〉, ③대재, 전에 없던 큰 재(역대조사원기법회)[4]《매일신보》, 1917년 4월 29일, 〈대재, 전에 없던 큰 재〉, ④봉은사수륙재 거행[5]《동아일보》, 1933년 6월 7일, 〈수륙재 거행, 봉은사에서〉 등의 기사가 보인다. 대체로 전쟁으로 인한 고혼들을 추도하고자 수륙재를 거행했다는 내용의 기사와 역대 조사 추모제에 관한 것인데, 이들 행사가 공통적으로 윤달이 드는 해에 행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한편, 봉은사 생전예수재는 기존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당시 예수재의 기복(祈福)적 성격에 대하여 불교계 내부의 자성적 목소리와 사회적 비판을 극복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대안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바로 생전예수재의 의미와 공덕을 새로운 불교 신행운동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금강경』과 같은 불서를 이웃에게 보시하는 등의 책 보시 운동을 하거나, 헌혈과 장기기증, 사후 화장 서약 등과 같이 자신을 정화하는 수행과 이웃을 위한 이타행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이른바 변화된 사회에 새로운 예수재 신행의 모범적 전형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6]성청환(2018), 「봉은사 생전예수재의 위상과 의의」, 『정토학연구』제30집, 서울: 한국정토학회, 244-247쪽.
오늘날 봉은사 생전예수재는 2016년부터 매년 주지스님의 지도 아래, 봉은사 생전예수재 어장 법안 스님 및 생전예수재보존회원 스님과 의례 전공 스님들이 주도하여 전통적인 불교의례 법식에 준하여 설행되고 있다. 또한 입재부터 마지막 회향에 이르는 기간 동안 생전예수재에 동참하는 신도들의 열렬한 참여와 지원 속에서 작게는 개인의 신앙심 고취에 기여하고 있으며, 크게는 수행과 보시를 통해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등 한국불교의 역사와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한층 더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대한불교 조계종 봉은사(1997), 『봉은사 사지』, 서울: 사찰문화연구원, 51-56쪽.
- 주석 2 《매일신보》, 1914년 6월 12일, 〈봉은사의 장졸초혼제〉
- 주석 3 《매일신보》, 1914년 7월 12일, 〈봉은사수륙재의 성황〉
- 주석 4 《매일신보》, 1917년 4월 29일, 〈대재, 전에 없던 큰 재〉
- 주석 5 《동아일보》, 1933년 6월 7일, 〈수륙재 거행, 봉은사에서〉
- 주석 6 성청환(2018), 「봉은사 생전예수재의 위상과 의의」, 『정토학연구』제30집, 서울: 한국정토학회, 244-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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