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에서는 혼인하기에 적당하고, 또 수의(壽衣)를 짓기에 적당하다고 여긴다. 무슨 일을 해도 좋다. 광주(廣州)의 봉은사(奉恩寺)에는 늘 윤달이 되면 도성의 여인들이 앞다투어 와서 불공을 드리고 탑전에 돈을 놓는다. 윤달이 다 가도록 이어지니, 이처럼 하면 극락세계로 돌아간다고 여겨 사방의 여인들이 물밀 듯이 다투어서 모인다. 서울과 지방의 사찰에 대부분 이런 풍습이 있다.[1]俗宜嫁娶, 又宜裁壽衣, 百事不忌. 廣州奉恩寺, 每當閏月, 都下女人, 爭來供佛, 置錢榻前, 竟月絡續, 謂如是則歸極樂世界. 四方婆媼, 奔波競集, 京外諸刹, 多有此風.(국립민속박물관 편(2021), 『조선대세시기Ⅲ』,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224쪽의 『동국세시기』윤달 내용 참조)
위의 내용은 윤달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나오는 문장이다.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이 책에 나오는 광주 봉은사는 현재 서울 강남구 소재 봉은사를 가리킨다. 당시 봉은사에서 행해진 윤달의 불공 모습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 이 기록에서는 현재 설행되는 봉은사 생전예수재 의례의 절차나 구체적인 양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봉은사를 언급하고 있는 조선시대 기록들 가운데, 특히 왕조실록과 승려의 문집 등에서는 불교 의례로서의 예수재에 관한 몇 가지 단서가 찾아진다.
『성종실록』(1471년, 9월 14일 계미)에 의하면, 봉은사의 전신인 견성암(見性庵)은 조선전기 왕실의 대표적인 원찰(願刹)이자 광평대군을 천도하는 재암(齋庵)으로 기능하였다. 한편, 왕실의 재원으로 스님들의 안거와 법회가 이루어졌으며, 수륙재와 관련한 불교의례집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 세조대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견성암 즉, 봉은사는 왕실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불교의 한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2]조선전기 견성암과 봉은사의 왕실불교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탁효정(2011),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8, 「조선시대 봉은사 수륙재의 역사적 전개」, 『동양고전연구』제73집, 서울: 동양고전학회; 강호선(2015), 「조선전기 왕실원찰 견성암의 조성과 기능」, 『서울학연구』제59호, 서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김자현(2021), 「15세기 조선 왕실의 숭불과 광평대군일가의 불전 간행」, 『보조사상』 제59집, 서울: 보조사상연구원.
또한, 명종대 봉은사의 주지를 역임하였던 허응보우(虛應普雨, 1509?~1565) 스님은 지금의 춘천 청평사(淸平寺)에서 예수재를 설행하면서 작성한 예수시왕재소(預修十王齋疏)를 남겼다. 그의 소문에는 절차에 맞는 의식에 따라 공경히 예수재를 설행한 공덕으로 모든 과보가 다 없어지고 목숨을 마치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나기 바라는 염원이 간절히 드러난다.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俗宜嫁娶, 又宜裁壽衣, 百事不忌. 廣州奉恩寺, 每當閏月, 都下女人, 爭來供佛, 置錢榻前, 竟月絡續, 謂如是則歸極樂世界. 四方婆媼, 奔波競集, 京外諸刹, 多有此風.(국립민속박물관 편(2021), 『조선대세시기Ⅲ』,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224쪽의 『동국세시기』윤달 내용 참조)
- 주석 2 조선전기 견성암과 봉은사의 왕실불교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탁효정(2011),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8, 「조선시대 봉은사 수륙재의 역사적 전개」, 『동양고전연구』제73집, 서울: 동양고전학회; 강호선(2015), 「조선전기 왕실원찰 견성암의 조성과 기능」, 『서울학연구』제59호, 서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김자현(2021), 「15세기 조선 왕실의 숭불과 광평대군일가의 불전 간행」, 『보조사상』 제59집, 서울: 보조사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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