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 수륙재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명확한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수륙사(水陸社)로 삼았다는 기록과 1571년에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와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1572년 『천지명양수륙잡문』 등 각종 의례집을 간행한 사실로 보아 조선초기에 이미 설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무위사 수륙재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1656)를 통해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37권 전라도 강진현 불우조에 “무위사, 월출산에 있다. 개운 3년(946)에 승려 도선이 처음 세웠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였으므로 이제 중수하여 수륙사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신증동국여지승람』 37권 「불우조」 “無爲寺 在月出山開運三年僧道詵所創歲久頹毁今重營因爲水陸社” 이것은 신증편 항목의 기사가 아니므로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481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전국적으로 수륙사를 지정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무위사의 경우는 대략 극락보전 건립 연대인 1430년보다는 늦고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481년 이전 시기 가운데 후불벽화의 제작 연대인 1476년보다는 약간 앞선 시기로 추정된다.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 - 1486)은 무위사를 수륙재 설행 사찰로 지정하고 무위사 불사에 적극 동참하여 수륙재를 설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백련사에서 왜구들의 노략질로 피해가 컸던 연안의 죽은 이들을 위한 추천과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무하기 위한 수륙재를 설행한 경우와 견주어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은 가까이 있던 미황사에서 수륙재를 설행할 때 「천변불사소(川邊佛事疏)」와 「천변시왕소(川邊十王疏)」 지은 것을 통해 해안가에서 수륙재가 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2]유일, 「천변불사소」 “發弘誓願 勸起海國人民 或有父母妻子 赴水溺死者 爲拯救之方便 開水陸之道場 兼設禮懺法席---伏以山居多虎亡 水居多渰死 勢所然矣 人未免焉 ---寧有覆舟之相尋 永無入海而不返”(『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 권3, 서울: 한불전 10, p.255b) 이런 점으로 볼 때, 해남과 강진 등 전라도 남해안 일대 사찰들을 중심으로 수륙재가 활발하게 설행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550년(명종 10)에 태감(太甘)이 중창하여 많은 당우를 세웠다. 1571년(선조 4)에는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와 『천지명양수륙재의촬요(天地冥陽水陸齋儀撮要)』, 그리고 1572년(선조 5)에는 『천지명양수륙잡문(天地冥陽水陸雜文)』 등 여러 수륙 의례집이 간행되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조선 초기에는 수륙재가 활발하게 설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1739년(영조 15)에 씌여진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에는 ‘수륙전(水陸殿)’을 기록하고 있다. 사적에 따르면, 통일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 국사(827-898)가 2창을 할 때 대웅보전, 보광전, 미타전, 나한전, 수륙전, 대장전 등을 건립하였다고 한다.[3]범해각안 후서찬, 「무위사사적」, 「전라좌도강진월출산무위사사적(全羅左道康津月出山無爲寺事蹟)」, 1739(乾隆四年己未年九月初五日) “無爲寺者在康津縣北四十里 … 寺有殿宇極其宏傑隋煬帝大業十三年 新羅眞平王三十九年丁丑 元曉國師初創曰 觀音寺 其廣張額數曰 大光明殿 弥陀殿 毘盧殿 東禪堂 西僧堂 東上室 西上室 東別室 西別室 瞻星閣 西門 鍾閣 天王門 解脫門 食堂 唐僖宗乾符二年 新羅憲康王元年乙未 道詵國師二刱曰葛屋寺 大雄寶殿 寶光殿 彌陀殿 羅漢殿 水陸殿 大藏殿 東方丈 西方丈 東禪堂 西僧堂 正門 沙門 寺蹟碑一塔 …” 이것에 의하면, 이미 통일신라시대에도 수륙전이 있었고, 수륙재도 설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적기가 조선후기에 쓰였음에도 그 이전의 사료에서 찾아보기 힘든 통일신라 때의 수륙전을 언급하고 있어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그럼에도 수륙재는 조선후기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그로 인해 수륙전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웃한 해남 대흥사에도 조선후기 승려 응현이 수륙전을 중수한 기록이 순조 23년(1823)에 간행된 『대둔사지(大芚寺誌)』에 기록되어 있음도 주목된다.
이외에는 조선후기 무위사에서 수륙재와 관련된 기록이나 유물을 찾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도 무위사 극락보전에 대한 기록들과 탐방기들은 남아 있다. 하지만 수륙재에 대한 언급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대에도 1990년대까지 수륙재로 볼 수 있는 재가 이어졌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후 맥이 끊겼다가 2018년부터 수륙재를 복원하여 해마다 가을에 설행하며 전통에 맞게 복원을 이어가고 있다.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신증동국여지승람』 37권 「불우조」 “無爲寺 在月出山開運三年僧道詵所創歲久頹毁今重營因爲水陸社”
- 주석 2 유일, 「천변불사소」 “發弘誓願 勸起海國人民 或有父母妻子 赴水溺死者 爲拯救之方便 開水陸之道場 兼設禮懺法席---伏以山居多虎亡 水居多渰死 勢所然矣 人未免焉 ---寧有覆舟之相尋 永無入海而不返”(『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 권3, 서울: 한불전 10, p.255b)
- 주석 3 범해각안 후서찬, 「무위사사적」, 「전라좌도강진월출산무위사사적(全羅左道康津月出山無爲寺事蹟)」, 1739(乾隆四年己未年九月初五日) “無爲寺者在康津縣北四十里 … 寺有殿宇極其宏傑隋煬帝大業十三年 新羅眞平王三十九年丁丑 元曉國師初創曰 觀音寺 其廣張額數曰 大光明殿 弥陀殿 毘盧殿 東禪堂 西僧堂 東上室 西上室 東別室 西別室 瞻星閣 西門 鍾閣 天王門 解脫門 食堂 唐僖宗乾符二年 新羅憲康王元年乙未 道詵國師二刱曰葛屋寺 大雄寶殿 寶光殿 彌陀殿 羅漢殿 水陸殿 大藏殿 東方丈 西方丈 東禪堂 西僧堂 正門 沙門 寺蹟碑一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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