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도읍을 사비성(충남 부여)으로 옮기면서 불교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서산 지역에 조성된 대표적인 불교 유적인 서산 마애불은 사비성 도읍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불교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인물은 제26대 성왕이다. 성왕은 사비성 천도를 단행하며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이용하고자, 양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며 많은 사찰을 도성 안에 창건했다.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에서는 백제에 “사탑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현재까지 부여 관내에서는 총 30곳의 백제 때 절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절터가 15곳, 조선시대의 절터가 6곳으로 총 51곳의 절터가 확인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의 사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볼 때 부여 지역은 24곳이 확인되며, 조선 후기의 부여 지역 사찰은 『여지도서』를 통해서 27곳이 확인된다. 그리고 현재 부여 지역에는 44곳의 사암이 소재하고 있다.
부여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불교민속으로 홍산(鴻山)의 괘불기우재와 규암나루 관등놀이 축제가 있다. 홍산의 괘불기우재는 수륙재·영산재 등과 더불어 야외에서 특별한 불교의식을 베풀 때 대형불화를 걸어두고 행한 괘불재의 하나이다. 즉, 극심한 가뭄 극복을 위해 홍산의 동헌마당에 무량사의 괘불을 걸어놓고 읍민들이 참석하여 비가 내리기를 기원한 의례였다. 홍산의 괘불기우재를 주관한 무량사는 부여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불교민속의 형성과 수륙재의 계승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955년 백제문화제 초기부터 공식행사로 정착한 수륙재를 무량사 스님들이 다수 참석하여 주관한 점이나, 1950-60년대 무량사 대혜 스님을 중심으로 범패 교육을 진행했다는 사실에서도 뒷받침된다.
규암나루 관등놀이는 부처님의 탄신일인 4월 초파일을 기념하여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부여읍과 마주보고 있는 규암리와 나루터 주변에서 벌어졌던 놀이이다. 규암나루 관등놀이는 사월 초삼일부터 초파일까지 6일간 계속된다. 초파일을 기해 거행되었던 규암나루 관등놀이는 일제 말기까지도 성대하게 거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30년대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중단된 뒤로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홍산의 괘불기우재와 1930년대 말까지 매년 성대하게 열린 초파일 규암나루 관등놀이는 부여 수륙재의 잃어버린 고리를 연결해줄 열쇠라고 할 수 있다.[1]부여 백제수륙재보존회(2016), 『부여 백제수륙재연구』, 서울: 민속원, 47-113쪽.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부여 백제수륙재보존회(2016), 『부여 백제수륙재연구』, 서울: 민속원, 47-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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