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제는 부여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행사다. 3천 궁녀와 3충신을 위하여 추모행사를 거행할 필요성을 느낀 주민들은 부여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비용을 모아 행사를 계획했다. 1955년 백제대제집행위원회를 구성,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부소산성에 제단을 설치하고 3천 궁녀와 3충신을 위하여 제향을 올렸다. 이때 부여 도성 함락 중에 강물에 몸을 던진 백제 여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륙재를 설행했다고 한다.
백제대제집행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한 초기의 부여 백제수륙재에는 당시 무량사의 여러 스님들이 참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60년대에는 무량사에서 대혜 스님을 중심으로 범패교육을 진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량사의 범패 교육은 여러 노스님들의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이후 부여 백제수륙재는 지속은 되나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후 백제문화제에서 삼충제와 궁녀제가 독자적인 추모 행사로 자리 잡게 되고, 공주에서도 여러 행사가 열려 규모가 커지면서, 수륙재에 대한 관심은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수륙재가 큰 발전 없이 정체되어 있을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단체로 ‘백제사적연구회’가 있다. ‘백제사적연구회’는 백제 문화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한때 부여 백제수륙재를 주도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부여사암연합회가 수륙재의 모든 봉행 과정을 맡고 있다.
백제문화제 속에서 부여 백제수륙재의 명칭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보면, ‘1회(1955) 삼천궁녀위령제’, ‘2회(1956) 수륙재’, ‘3회(1957) 삼천궁녀위령제’, ‘4-10회(1958-1964) 삼천궁녀위령제와 수륙재가 혼용’, ‘11회(1965) 궁녀제’, ‘12회(1966) 궁녀사 건립으로 수륙재 독자 진행’, ‘13회(1967) 수륙재’, ‘14회(1968) 봉행 못함’, ‘15-16회(1969-1970) 수륙재’, ‘17-25회(1971-1979) 봉행 못함’, ‘26회(1980)-현재 수륙재(수륙대재)’, ‘38회(1992)·40회(1994) 수륙무차대법회’이다. 1980년 이후부터 수륙재라는 명칭이 정착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수륙재가 지금까지 봉행되면서 장소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초창기에는 구드래 강변에서 삼천궁녀제 또는 수륙재를 봉행한 후 백마강상으로 이동하여 마무리 행사를 거행하였다. 지금 설행되고 있는 방식은 정림사지 의례-구드래 강변으로 이운-본의식-백마강상 수륙재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부여사암연합회와 부여수륙재보존회에서는 2016년에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모아 『부여 백제수륙재 연구』를 발간하였고, 2017년에는 의식집으로『부여무차평등수륙재의문』을 만들어 부여 백제수륙재에서 사용하고 있다.[1]부여 백제수륙재보존회(2016), 『부여 백제수륙재연구』, 서울: 민속원 115-159쪽.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부여 백제수륙재보존회(2016), 『부여 백제수륙재연구』, 서울: 민속원 115-159쪽.
관련기사
-
조선시대 삼화사수륙재삼화사수륙재는 조선 태조 4년(1395)에 건국과정에서 희생된 고려 왕씨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설행한 것으로부터 기원한다. 그 전 해인 1394년에 태조는 금자 사경 『묘법연화경』 1본과 『수륙의문』 7본을 관음굴과 삼화사, 현암사 3곳에 각각 비치하도록 하였다. 이듬해부터 해마다 봄·가을로 수륙재를 지내도록 하였다. 『태종실록』에는 태종 1년(1401) 상원사에서 수륙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 14년(1414)에는 수륙재 설행일을 매년 2월 15일(음)에서 1월 15일로 옮겨 연등회와 합설하게 된다... -
현대 삼화사수륙재삼화사수륙재는 2001년 공주 갑사에서 발간된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1547)가 발견됨으로 국행수륙재 복원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2005년부터 매년 10월 3일간 수륙재를 설행하고 있다. 수륙재의 지속적 설행을 위해 2009년 3월 31일 삼화사국행수륙대재보존회를 결성하였다. 차츰 복원된 수륙재는 2013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의 국가중요무형문화재(제125호)로 보유자 없는 보유단체로 진관사수륙재와 함께 지정되었다.문화재청 고시 제2013-130호, 《중요무형문화재 신규종목 지정(보유단체 인정), 보유자·명예보유자 인정 및... -
삼화사수륙재의 개요삼화사수륙재(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의 전통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화사에 소장되어 전하고 있는 갑사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와 덕주사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가 삼화사수륙재의 전통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삼화사수륙재의 특징으로는 지화제작, 설단, 장엄, 고임새 등 준비 단계부터 수륙재 의례의 전반에 걸쳐 삼화사 신도들이 적극 참여하며 소통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다지고 있는 점에 있다. 의례적 측면에서의 특징으로는 ①전통을 계승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설행되고 있는 점, ②수인작법... -
조선시대 진관사수륙재조선시대 진관사 수륙재와 관련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과 권근(權近, 1352-1409)의 「진관사 수륙사 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기록에 따르면 태조는 수륙사(水陸社)를 완공하기까지 수차례 진관사에 거둥(擧動)하면서 삼단(三壇)의 위치를 정하는 등 큰 관심을 기울였다. 완공하던 달에는 사찰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한다. 수륙사는 수륙재를 지내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건축물이다. 수륙사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으나 「진관사수륙사조성기」에는 총 59칸으로 상단·중단·하단의 9칸, 중단...
-
근현대 진관사수륙재근대의 진관사 수륙재는 신문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독립신문》 1897년 9월 30일자 기사에서 어떤 스님은 아무 대신 집, 어떤 내인, 월욱이라는 스님은 서흥 군수 모씨가 진관사에서 조상의 천도재를 지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재를 준비하는 모습을 ‘스님들이 종이를 오려 각색의 가화(假花)를 만들고 그림도 그리며 부적도 쓰거늘.’〈잡보〉, 《독립신문》(서재필), 1897년 9월 30일자, 3면.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재를 앞두고 지화를 만들고 번과 같은 장엄물과 불화를 그리며 다라니를 쓰는 등의 모습에서 수륙...
-
아랫녘수륙재의 역사아랫녘수륙재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원곡 무학산 백운사를 도량으로 삼고 있다. 무학산 이외에 아랫녘수륙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영산이 있는데, 창원시 성산구 성주동과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에 위치한 해발 801m의 불모산이다. 불모산에 위치한 성주사와 장유암은 아랫녘수륙재의 연원을 찾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불모산은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首露王, 미상-199)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 미상-188)이 낳은 아들 7명이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전설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장유암은 허 황후와 함께 인도에서 ... -
인천수륙재의 역사인천수륙재의 발원지는 현재 사적지로 지정된 강화도 마니산 아래 ‘묘통사(妙通寺)’로 본다. 묘통사는 고려시대 국가의 비보사찰 및 왕실의 원찰로서 여러 왕들이 행차하고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특히 고려말 조선초 학자·문신인 권근(權近, 1352-1409)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에 ‘묘통사수륙재소(妙通寺水陸齋䟽)’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찰에서 수륙재가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인천수륙재는 고려시대 이후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최근 1980년도에 와서야 법운 스님과 서운 스님(화엄종)에 의해 작은 규모로 설행되어 명맥을... -
용주사수륙재의 역사용주사와 관련된 수륙재 기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려 광종 22년(97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수륙도량을 베풀었다는 기록최량(崔亮)(994), 「갈양사혜거국사비」. 비는 현재 전하지 않고 비문을 옮겨 쓴 필사본으로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능화(1917.03), 「혜거국사비」, 《조선불교총업》제1호, 19-22쪽; 허흥식(1990), 「갈양사 혜거국사비」, 『고려불교사연구』, 서울: 일조각; 한국역사연구회 편(1996), 『譯註 羅末麗初金石文(上)-原文校勘篇』, 서울: 혜안.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
부여의 불교문화백제는 도읍을 사비성(충남 부여)으로 옮기면서 불교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서산 지역에 조성된 대표적인 불교 유적인 서산 마애불은 사비성 도읍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불교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인물은 제26대 성왕이다. 성왕은 사비성 천도를 단행하며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이용하고자, 양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며 많은 사찰을 도성 안에 창건했다.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에서는 백제에 “사탑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현재까지 부여 관내에서는 총 30곳의 백제 때 절터가 확인되었다. ...
-
보원사수륙재의 역사보원사는 창건이래로 16세기 중반 수륙의문이 판각되기까지 수륙재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6세기 중후반 보원사에서 14종의 목판이 제작되었다. 그 중에 수륙재와 관련된 판본은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1565),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1566),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1566), 『천지명양수륙잡문』(1581) 4종이 있다. 또한 『묘법연화경』(1565)이 함께 간행되었는데 이는 수륙재 의식의 주요 독송 경전으로써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륙재 설행 관련 기사가 보이지 않아 그것이 어떤 형식이었는지를... -
무위사수륙재의 역사무위사 수륙재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명확한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수륙사(水陸社)로 삼았다는 기록과 1571년에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와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1572년 『천지명양수륙잡문』 등 각종 의례집을 간행한 사실로 보아 조선초기에 이미 설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무위사 수륙재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1656)를 통해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37권 전라도 강진현 불우조에 “... -
봉은사예수재 의례집예수재의 의례집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는 현존 판본의 추이를 통해 볼 때, 대체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후반에 걸쳐 널리 간행·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전 판본은 본편의 구성 편수에 따라 25편과 31편의 두 계통으로 구분된다. 한편, 1935년 안진호가 편찬한 『석문의범』에 수록된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는 본편 3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봉은사 생전예수재에 사용되는 의례집 『생전예수시왕생칠재의찬문(生前預修十王生七齋儀纂文)』은 2017년 초판 발행 이후, 2020년 4판 발행본으로 (사)생전예수재보존회가 편찬하... -
봉은사예수재 어산단봉은사 생전예수재 어산단에는 봉은사 생전예수재 어장 법안 스님(조계종 불교어산작법학교장)과 법주·설단 장엄에 인묵 스님(조계종 어산어장)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범패와 작법에는 주로 봉은사 (사)생전예수재보존회원 스님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모두 10인의 스님들이 의례를 집전하고 있다. 악단에는 이용원(태평소), 이석호(대금), 이숙연(아쟁), 강만석(장구)의 4인이다. 이밖에 의례 진행 담당 1인이 포함되어, 봉은사 생전예수재의 어산단은 모두 15인으로 구성되어 있다.성청환(2021), 『생전예수재』, 서울: 서울특별시, 131... -
봉은사예수재 범패현재 봉은사 생전예수재를 설행하는 어산단의 범맥은 일응(一應) 스님이며, 스님은 한국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작법무 기능보유자로 활동하였다. 전북 전주 출신으로 호남 범패와 작법을 두루 익힌 후, 서울 봉원사와 개원사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 범패와 교류하였다. 일응 스님의 소리와 작법무는 현재 조계종의 범패·작법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봉은사 생전예수재 어장 법안(法眼) 스님은 마산 출신으로 영남의 범패를 자연스럽게 체득하였다. 이후, 일응 스님과 인묵(仁黙) 스님으로 이어져온 완제 범패를 학습하였고, 송암(松岩) 스님으... -
봉은사예수재 작법봉은사 생전예수재에는 착복무(着服舞), 바라무(哱囉舞), 법고무(法鼓舞) 등 다양한 작법무가 행해진다. 의례 전체에서 보면, 바라무가 가장 많이 추어졌고, 다음으로 착복무, 법고무의 순서이다. 양 손에 바라를 들고서 활달하고 힘 있게 추는 바라무는 불보살의 강림이나 의식도량의 옹호와 같은 신비성을 북돋을 때 추는 춤이다. 부처님을 찬양하고 허공중생을 천도한다는 뜻에서 추는 춤으로, 잡귀가 의식도량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선(善)의 뜻을 가진 영혼들에게 지혜를 넣어주며 또한 모든 불보살과 작법도량을 수호해준 사방금강신을 찬미하... -
조선시대 봉은사예수재세속에서는 혼인하기에 적당하고, 또 수의(壽衣)를 짓기에 적당하다고 여긴다. 무슨 일을 해도 좋다. 광주(廣州)의 봉은사(奉恩寺)에는 늘 윤달이 되면 도성의 여인들이 앞다투어 와서 불공을 드리고 탑전에 돈을 놓는다. 윤달이 다 가도록 이어지니, 이처럼 하면 극락세계로 돌아간다고 여겨 사방의 여인들이 물밀 듯이 다투어서 모인다. 서울과 지방의 사찰에 대부분 이런 풍습이 있다. 위의 내용은 윤달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나오는 문장이다.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이 책에 나오는 광주 봉은사는 현재 서울 강...
-
근현대 봉은사예수재1911년 조선총독부는 사찰령 및 사찰령시행규칙을 발표․제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조선 불교계를 통제하기 위해 사찰의 재산권, 주지 임면권 등을 장악하였으며, 그 시행의 편의를 위해 30개의 본사와 그에 속한 말사의 형태로 전국 사찰을 구분하였다. 봉은사는 이 제도가 시행된 1911년부터 서울과 경기도 일원의 80여 사암을 관장하는 본사로 지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봉은사는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이었던 조선시대의 위상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수도권의 80여 사암을 대표하는 본사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
-
조선시대 청련사예수재한국 불교에서 예수재 의식 자체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 시기는 조선중기이다. 따라서 청련사에서도 이 시기에 생전예수재를 설행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청련사가 조선전기부터 왕실의 왕생발원을 위한 원찰(願刹)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왕생발원 의식인 예수재 또한 다른 사찰 이상으로 설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청련사 소장 「감로도」(1880)를 확인하더라도 청련사에서 조선시대에 예수재를 설행했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청련사 〈감로도〉에는 범패, 작... -
현대 청련사예수재근대에 청련사에서 생전예수재를 설행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청련사 예수재의 근현대 설행은 1960년대부터 확인 가능하다. 청련사에 지금까지 주석하고 있는 스님들의 구술에 의하면 당시 청련사에서는 윤달이 드는 해마다 예수재를 치렀다고 한다. 출가해보니 우리 절에서는 영산재를 그렇게 많이 했습니다. 개인 사십구재로 하는 영산재를 엄청 많이…. 예수재는 그리 못하고, 윤달이 들었을 때 합동으로 했어요. 여럿이 비용을 만들어야 재 채비를 하는 거니까 윤달마다 하고…. 큰 재가 들면 우리 스님들이 다른...
-
수륙재수륙재는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공양하는 불교 의례이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와 고혼(孤魂)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큰 법회(法會)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는 고려시대에 시작된 후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2013년에는 삼화사·진관사의 수륙재가, 2014년에는 아랫녘 수륙재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과거 수륙재는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하는 국행수륙재도 있었지만, 왕실의 발원이나 대규...
더보기 +
관련자료
더보기 +
더보기 +
-
부여 백제수륙재연구
-
부여무차평등수륙재의문
더보기 +
더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