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와 관련된 수륙재 기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려 광종 22년(97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수륙도량을 베풀었다는 기록[1]최량(崔亮)(994), 「갈양사혜거국사비」. 비는 현재 전하지 않고 비문을 옮겨 쓴 필사본으로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능화(1917.03), 「혜거국사비」, 《조선불교총업》제1호, 19-22쪽; 허흥식(1990), 「갈양사 혜거국사비」, 『고려불교사연구』, 서울: 일조각; 한국역사연구회 편(1996), 『譯註 羅末麗初金石文(上)-原文校勘篇』, 서울: 혜안.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정조 14년(1790)에 용주사 창건을 기념하여 왕실에서 주최하는 무차대회(無遮大會)가 크게 설행되었다는 기록[2]이덕무, 『천장관전서』 권71, 부록 하「선고적성현감부군년보상(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경술년 9월-10월조.이다.
갈양사 수륙재와 용주사 수륙재가 연관되는 이유는 용주사가 갈양사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3]갈양사가 용주사의 전신이라는 믿음은 「갈양사혜거국사비(惠居國師碑)」에 근거한다. 그런데 최근 이 비의 존재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었고(최연식(2021), 「〈신라 한산주의 불교 사찰과 갈양사〉 토론문」, 『무형문화재 등록을 위한 용주사 수륙재 학술포럼 자료집』, 서울: 동국대 불교학술원 문화재연구소, 20-22쪽), 갈양사의 위치 비정에도 아직 이견이 있어 관련된 후속 연구가 더 필요하다. 용주사 수륙재와 관련한 보다 명확한 기록은 정조대에 이르러 확인된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사(陵寢寺)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사찰에 금불(金佛)을 봉안한 날 즈음하여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최하였다는 내용이다. 정조는 채제공(蔡濟恭)에게 용주사 상량문을 짓게 하고, 이덕무(李德懋)에게는 직접 무차대회에 가서 채제공이 지은 상량문을 읽게 하였다. ‘무차대회’와 ‘수륙재’는 서로 혼용되어 사용된 개념이므로 이 날의 무차대회를 수륙재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4]엄밀하게 구분하자면, 무차대회는 차별 없이 모든 중생에게 불법과 공양을 베푸는 법회이고, 수륙재 또한 이와 같이 물과 뭍, 땅과 하늘, 이승과 저승의 모든 중생에게 공양을 베풀고 수행을 하는 재의식이다. 무차대회가 법회의 의미를 강조한 명칭이라면, 수륙재는 죽은 이를 위한 천도의식을 강조한 명칭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무차대회는 정조가 설행 주체가 되어 그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복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을 것이므로 무차대회이면서 재의식을 겸한 수륙재였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용주사에서 설행된 당시의 국행수륙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다. 조선후기 수륙재가 경내의 중정에서 치러지고 상·중·하단의 설단 양식을 구성하여 치렀던 기록에 의거하여, 용주사 수륙재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또한 당시 큰 법회에서는 야외에 불화를 걸어놓고 의식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용주사 무차대회에서도 왕명으로 제작된 불화들이 의식에 활용되었을 것이다. 1790년 용주사 창건과 함께 조성된 불화인 삼세여래체탱(三世如來體幀),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감로도(甘露圖) 등은 각각 상단, 중단, 하단에 모시는 대상을 상징하므로 당시 수륙재 설단 장엄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5]김정희(2021), 「용주사 수륙재와 불화」, 『무형문화재 등록을 위한 용주사 수륙재 학술포럼 자료집』, 서울: 동국대 불교학술원 문화재연구소, 55-70쪽. 다만 이 불화들이 괘불의 형태가 아니라 후불화라는 점에서 야외 걸개그림을 따로 제작하였는지, 이 불화들이 봉안된 전각을 설단으로 활용하였는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1790년 용주사 창건을 기하여 치러진 무차대회 이후 용주사에서 설행된 수륙재 기록은 없다. 여러 정황상 용주사의 수륙재는 정조의 지원 아래 계속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정조의 서거 이후 용주사의 위상이 급격히 낮아진[6]정해득(2009), 「정조의 용주사 창건 연구」, 『사학연구』제93호, 서울: 한국사학회, 181쪽. 것을 고려할 때, 대규모 불교 재회를 거행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흔들렸기 때문에 정조대 이후의 용주사 수륙재 실행 여부는 확언이 어렵다.
근대기의 용주사 수륙재와 관련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1930년대에 제작된 아미타삼존괘불을 볼 때, 야외 법회가 설행되었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이 수륙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로 수륙재 전승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2017년에 수륙재를 복원하여 매년 가을에 계속되고 있다.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최량(崔亮)(994), 「갈양사혜거국사비」. 비는 현재 전하지 않고 비문을 옮겨 쓴 필사본으로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능화(1917.03), 「혜거국사비」, 《조선불교총업》제1호, 19-22쪽; 허흥식(1990), 「갈양사 혜거국사비」, 『고려불교사연구』, 서울: 일조각; 한국역사연구회 편(1996), 『譯註 羅末麗初金石文(上)-原文校勘篇』, 서울: 혜안.
- 주석 2 이덕무, 『천장관전서』 권71, 부록 하「선고적성현감부군년보상(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경술년 9월-10월조.
- 주석 3 갈양사가 용주사의 전신이라는 믿음은 「갈양사혜거국사비(惠居國師碑)」에 근거한다. 그런데 최근 이 비의 존재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었고(최연식(2021), 「〈신라 한산주의 불교 사찰과 갈양사〉 토론문」, 『무형문화재 등록을 위한 용주사 수륙재 학술포럼 자료집』, 서울: 동국대 불교학술원 문화재연구소, 20-22쪽), 갈양사의 위치 비정에도 아직 이견이 있어 관련된 후속 연구가 더 필요하다.
- 주석 4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무차대회는 차별 없이 모든 중생에게 불법과 공양을 베푸는 법회이고, 수륙재 또한 이와 같이 물과 뭍, 땅과 하늘, 이승과 저승의 모든 중생에게 공양을 베풀고 수행을 하는 재의식이다. 무차대회가 법회의 의미를 강조한 명칭이라면, 수륙재는 죽은 이를 위한 천도의식을 강조한 명칭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무차대회는 정조가 설행 주체가 되어 그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복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을 것이므로 무차대회이면서 재의식을 겸한 수륙재였을 것이다.
- 주석 5 김정희(2021), 「용주사 수륙재와 불화」, 『무형문화재 등록을 위한 용주사 수륙재 학술포럼 자료집』, 서울: 동국대 불교학술원 문화재연구소, 55-70쪽.
- 주석 6 정해득(2009), 「정조의 용주사 창건 연구」, 『사학연구』제93호, 서울: 한국사학회,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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