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수륙재의 발원지는 현재 사적지로 지정된 강화도 마니산 아래 ‘묘통사(妙通寺)’로 본다. 묘통사는 고려시대 국가의 비보사찰 및 왕실의 원찰로서 여러 왕들이 행차하고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1]『고려사절요』 7, 9, 15권에 예종(1106)이 묘통사(妙通寺)에 거둥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인종(1125) 묘통사에 행차하여 비오기를 빌었다. 고종(1217)이 왕이 묘통사에 행행하여 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을 베풀고, 거란병의 격퇴를 빌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형우는 1251년(고종38) 4월 병오일에는 국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했으며, 이틀 뒤인 무신일에 또 묘통사에 갔다.(『고려사』, 권24, 세가 고종38년 4월조) 또 1254년(고종41) 9월에도 국왕이 묘통사에 갔다가 이틀 뒤에 왕륜사에 행차하고 있다.(『고려사』 권24, 세가 고종41년 9월조) 묘통사와 왕륜사는 모두 마니산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誌)』에 기록되어 있다.(김형우(2005)「고려시대 강화의 사원 연구-고려시대의 강화 연구 소주제3-」, 『국사관논총』 제106집,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76쪽.) 특히 고려말 조선초 학자·문신인 권근(權近, 1352-1409)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에 ‘묘통사수륙재소(妙通寺水陸齋䟽)’가 있는 것으로 보아[2]『양촌집』 권27, 「묘통사수륙재소(妙通寺水陸齋䟽)」. 이 사찰에서 수륙재가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인천수륙재는 고려시대 이후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최근 1980년도에 와서야 법운 스님과 서운 스님(화엄종)에 의해 작은 규모로 설행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인천수륙재 보유자인 일초 스님[3]일초 스님은 1967년부터 10여년간 보은 법주사 등에서 전통 천도의식을 공부했고, 1980년부터 6년여간 인천 해광사 등에서 인천 수륙재를 배웠다. 법주사 강원 대교과를 수료한 스님은 박법운 마일운 박송암 스님 등에게서 범패를 사사 받았다. 현재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2호 범패와 작법무 보유자이자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 인천수륙재 보유자이다.은 그 당시 약사사에 머물며 법운 스님과 운포 스님이 인천수륙재를 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 이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명맥이 끊길 것 같은 생각에 1980년부터 6년 동안 인천 해광사(海光寺) 등에서 인천수륙재 의식을 배웠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천수륙재가 전승되게 된 내력이다.[4]2022년 6월 3일 인천수륙재 보유자 일초 스님 인터뷰 내용.
일초 스님은 2004년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이후 해마다 6월이면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위로하는 인천수륙재 시연행사를 연다. 2022년 18회째를 맞고 있다. 보유자 일초 스님 외 전수자를 포함한 이수생 2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고려사절요』 7, 9, 15권에 예종(1106)이 묘통사(妙通寺)에 거둥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인종(1125) 묘통사에 행차하여 비오기를 빌었다. 고종(1217)이 왕이 묘통사에 행행하여 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을 베풀고, 거란병의 격퇴를 빌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형우는 1251년(고종38) 4월 병오일에는 국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했으며, 이틀 뒤인 무신일에 또 묘통사에 갔다.(『고려사』, 권24, 세가 고종38년 4월조) 또 1254년(고종41) 9월에도 국왕이 묘통사에 갔다가 이틀 뒤에 왕륜사에 행차하고 있다.(『고려사』 권24, 세가 고종41년 9월조) 묘통사와 왕륜사는 모두 마니산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誌)』에 기록되어 있다.(김형우(2005)「고려시대 강화의 사원 연구-고려시대의 강화 연구 소주제3-」, 『국사관논총』 제106집,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76쪽.)
- 주석 2 『양촌집』 권27, 「묘통사수륙재소(妙通寺水陸齋䟽)」.
- 주석 3 일초 스님은 1967년부터 10여년간 보은 법주사 등에서 전통 천도의식을 공부했고, 1980년부터 6년여간 인천 해광사 등에서 인천 수륙재를 배웠다. 법주사 강원 대교과를 수료한 스님은 박법운 마일운 박송암 스님 등에게서 범패를 사사 받았다. 현재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2호 범패와 작법무 보유자이자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 인천수륙재 보유자이다.
- 주석 4 2022년 6월 3일 인천수륙재 보유자 일초 스님 인터뷰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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