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녘수륙재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원곡 무학산 백운사를 도량으로 삼고 있다. 무학산 이외에 아랫녘수륙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영산이 있는데, 창원시 성산구 성주동과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에 위치한 해발 801m의 불모산이다.
불모산에 위치한 성주사와 장유암은 아랫녘수륙재의 연원을 찾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불모산은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首露王, 미상-199)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 미상-188)이 낳은 아들 7명이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전설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장유암은 허 황후와 함께 인도에서 건너온 일행 중 아유타국의 태자 허보옥(許寶玉)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내용은 1915년 허식이 지은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駕洛國師長遊和尙紀蹟碑)」에 기록되어 있다.[1]국립무형유산원(2017), 『아랫녘수륙재』, 서울: 민속원, 30-31쪽.
아랫녘수륙재는 불모산 장유암에 주석한 웅파덕민(熊坡德旻)을 중시조로 종문계보(宗門系譜)를 형성하고 있다. 아마도 웅파는 불모산 웅산에 위치한 장유암에 오랫동안 머물던 인연으로 법명을 웅파라고 한 것 같다. 웅파 입적 후, 종문들은 1861년 2월 장유암에서 장유암 웅파 종문회를 결성하여 그 뜻을 받들기로 결의하면서 그 기틀을 잡아 간다. 웅파덕민의 가르침은 그의 법제자 해암혜규(海庵慧奎)에게 이어지고, 해암은 그의 법제자 인봉화순(仁峰和順, 1827-1903)에게로 이어진다. 인봉화순은 불모산 성주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사실상 불모산소리의 모태를 형성한다.
이후 인봉화순의 불모산소리는 법제자 우담재희(雨潭在希, 1882-1968)에게로 전해졌고, 우담재희 또한 성주사에 머물면서 불모산소리를 계승·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특히 우담재희는 통영 용화사(龍華寺)의 연파(連坡)와 해담(海潭), 진주의 보월과 함께 1892년부터 경남 일원에서 큰 절의 재를 이끌면서 통영·고성·부산·김해·진주를 비롯한 경상도 일원의 아랫녘소리를 풍미한 주역이었다. 우담재희가 입적한 뒤로는 그의 법제자 명해의현(冥海義玄, 1924-1998)과 통도사의 강백 벽봉(碧峰) 등에 의해 통·고소리의 법맥을 잇고 있다. 이들이 입적한 뒤로는, 1971년부터 창원 무학산 백운사의 석봉철우(石峰哲佑, 1955-)가 통고소리의 법맥을 이어받아 아랫녘소리를 이끄는 어장으로 전승 활동에 큰 힘을 쏟고 있다.[2]국립무형유산원(2017), 『아랫녘수륙재』, 서울: 민속원, 32-33쪽.
석봉철우는 해담의 범음·범패성과 우담재희의 법제자 명해의현에게 소리·바라무·학무·법고무 등을 이어받아 오늘날 아랫녘수륙재의 전승사적 예맥을 형성하고 있다.[3]국립무형유산원(2017), 『아랫녘수륙재』, 서울: 민속원, 33쪽.
아랫녘수륙재는 경남 일대에서 전승되던 범패의 맥을 이어서 그 역사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지난 201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아랫녘수륙재보존회가 현재까지 그 전통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국립무형유산원(2017), 『아랫녘수륙재』, 서울: 민속원, 30-31쪽.
- 주석 2 국립무형유산원(2017), 『아랫녘수륙재』, 서울: 민속원, 32-33쪽.
- 주석 3 국립무형유산원(2017), 『아랫녘수륙재』, 서울: 민속원,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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