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진관사 수륙재는 신문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독립신문》 1897년 9월 30일자 기사에서 어떤 스님은 아무 대신 집, 어떤 내인, 월욱이라는 스님은 서흥 군수 모씨가 진관사에서 조상의 천도재를 지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재를 준비하는 모습을 ‘스님들이 종이를 오려 각색의 가화(假花)를 만들고 그림도 그리며 부적도 쓰거늘.’[1]〈잡보〉, 《독립신문》(서재필), 1897년 9월 30일자, 3면.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재를 앞두고 지화를 만들고 번과 같은 장엄물과 불화를 그리며 다라니를 쓰는 등의 모습에서 수륙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매일신보》 1916년 6월 27일자 기사에서 진관사 마포 포교당에서 수륙재를 설행했는데, ‘선황선후열위선가(先皇先后列位仙駕)와 시방법계의 일체고혼과 각기 선망부모의 고혼과 수부중생(水府衆生)을 위해 마포 강가에서 수륙재를 설행하고 어부식(魚富食)을 시행하였다.’[2]〈종교계소식: 진관사의 수륙재〉, 《매일신보》, 1916년 6월 27일자, 2면.고 한다. 한강변에서 수륙재를 치르면서 용왕제에 해당하는 어부식을 병행한 것이다.
진관사 수륙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맥이 잠시 끊겼다가, 1965년에 주지로 부임한 진관 스님이 사찰을 중창한 뒤 1968년 대웅전 준공기념으로 수륙재를 봉행하였다.
1970년대에 자운 스님은 『법계성범수륙대재보리도량성상통론(法界聖凡水陸大齋普利道場性相通論)』12책, 『수륙재진언(水陸齋眞言)』1책, 『수륙도량법륜보참(水陸道場法輪寶慘)』5책, 제목 미상 1책, 수륙방문(水陸榜文) 등 각종 의식문 10책을 200자 원고지에 자필로 쓴 것과 복사본 1점을 포함해 총 29책으로 수륙재 의식문을 집성하였다.[3]관사(2010), 『진관사 국행수륙대재의 조명』, 서울: 진관사, 60-70쪽. 이를 바탕으로 1977년 음력 9월 1일부터 7일 동안 진관사에서 ‘건명양지승회(建明陽之勝會)’라는 이름으로 수륙재를 재현하였다. 이 당시 수륙재의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1〉1977년 복원 당시 수륙재의 주요내용
| 시간 | -설행기간: (음 9.1.-9.7.) -첫날: 자시(子時. 밤11-01시) 시작. 실제는 사정에 따라 1시간 일찍 시작함. -회향: 오전 8시-오후 6시 |
| 소임 | 법주: 자운(慈雲) 스님, 경필: 석주(昔珠) 스님, 염불: 영암(映岩) 스님, 설단·탱화: 신상균, 회향: 송암(松岩) 스님 |
| 설단 | -괘불을 명부전 쪽으로 모시고 괘불단에 공양물을 차림. -삼존불탱 등의 탱화를 모시고 탱화 아래 각 단을 차림. -각 단은 높지 않은 사각상에 광목으로 덮고, 상과 그릇을 모두 새것으로 마련함. -관욕소는 대웅전 마당에 크게 지어 칸막이로 구분. |
| 공양물 | -떡, 밤, 과일 등 진수 7가지를 차림. -회색의 폐백목(幣帛木)을 올리고, 회향 후 승려들에게 가사공양을 올림. |
| 장엄 | -각 단의 탱화 위쪽에 모시는 대상의 위목(位目)을 쓴 번을 달아둠. -신묘장구대다라니 번을 도량 전체에 달고, 향을 한 묶음씩 꽂아 피움. |
| 의례내용 | -사자(使者)를 청해 성현들에게 수륙도량을 아뢰는 사자첩(使者牒)을 보냄. -자운 스님이 법주로서 법인을 맡음. -유가시식(瑜伽施食)을 집전해 무량수여래근본다라니(無量壽如來根本陀羅尼)를 설함. -자운 스님이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서 모든 영가에게 보살계(菩薩戒)를 줌. -7일 회향 때 각 단의 전물(奠物)을 한강으로 가져가서 흘려보내며 시식을 베풂. |
진관사에서는 자운 스님이 수륙재를 복원한 이후, 윤달이 든 해마다 수륙재를 설행해 왔으며 법주는 송암 스님이 지속적으로 맡았다. 윤2월이 든 2004년의 수륙재는 봄에 설행되었으며, 입재부터 육재까지 마친 뒤 마지막 49일째 되는 칠재에 회향하였다. 당시의 의식절차는 오전에 ‘시련-대령-관욕-법문’을 하였고, 오후에 ‘영산작법-사자단-오로단-상단-중단-하단-영가단-전시식-봉송’으로 진행되었다. 현재의 수륙재 절차와 큰 차이가 없으나 법문과 영산작법의 순서가 바뀐 점, 하단과 영가단을 구분하고 전시식을 주요 절차로 부각시킨 점 등이 다르다.[4]국립무형유산원(2017), 『진관사 수륙재』, 서울: 민속원, 57-68쪽.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잡보〉, 《독립신문》(서재필), 1897년 9월 30일자, 3면.
- 주석 2 〈종교계소식: 진관사의 수륙재〉, 《매일신보》, 1916년 6월 27일자, 2면.
- 주석 3 관사(2010), 『진관사 국행수륙대재의 조명』, 서울: 진관사, 60-70쪽.
- 주석 4 국립무형유산원(2017), 『진관사 수륙재』, 서울: 민속원, 57-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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