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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관사수륙재

조선시대 진관사 수륙재와 관련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과 권근(權近, 1352-1409)의 「진관사 수륙사 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기록에 따르면 태조는 수륙사(水陸社)를 완공하기까지 수차례 진관사에 거둥(擧動)하면서 삼단(三壇)의 위치를 정하는 등 큰 관심을 기울였다. 완공하던 달에는 사찰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한다. 수륙사는 수륙재를 지내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건축물이다. 수륙사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으나 「진관사수륙사조성기」에는 총 59칸으로 상단·중단·하단의 9칸, 중단과 좌우욕실 6칸, 하단과 좌우욕실 6칸, 좌우욕실 16칸을 합하면 주요 공간은 37칸에 해당한다. 따라서 나머지 22칸은 대문 1칸, 행랑 6칸, 주방 2-3칸, 곳간 10-13칸 정도로 추정된다. 진관사의 수륙재 설행과 관련된 기록은 1398년(태조 7) 1월 6일에 처음 등장하며, 1414년(태종 14)에는 진관사를 비롯하여 관음굴·상원사·현암사에서 2월 15일에 행해지던 수륙재를 1월 15일에 지내도록 하였다. 또한, 1415년(태종 15)에는 호조에 명하여 진관사에 쌀·콩을 헤아려 주게 하였다. 이는 진관사에서 수륙재 위전(位田) 1백 결을 결산했을 때, 10월 수륙재에 쓰고 남은 쌀과 콩으로는 정월 수륙재를 치르기에 부족하다는 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진관사에서는 매년 정월과 10월에 정기적으로 수륙재를 설행했으며, 나라에서 수륙재를 치르도록 진관사에 수륙전(水陸田)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연례적인 수륙재 외에도 비정기적인 수륙재가 필요에 따라 설행되었다. 1418년(태종 18), 태종은 일찍 죽은 4남인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을 위해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1421년(세종 3), “선후의 기일에 재를 올리는 것은 내섬시(內贍寺)가 진관사에서 올리는 것을 법식을 삼았다.”라고 한 기록 등에서 확인된다. 1451년(문종 1)에는 진관사의 수륙사 중창에 참여한 스님 218인에게 대선사(大禪師)를 제수하였다. 진관사의 수륙재 관련 기록은 연산군대(1494-1506)까지 등장하며 16세기 무렵 수륙사가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1]국립무형유산원(2017), 『진관사 수륙재』, 서울: 민속원, 54-57쪽.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국립무형유산원(2017), 『진관사 수륙재』, 서울: 민속원, 5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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