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부터 조선전기까지 국행의례로서 수륙재가 주로 설행되었으나,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 신행이 제한되면서 사찰 중심의 수륙재가 종문(宗門)이나 일가(一家)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이전 시기의 의례 전통을 계승하여 망자(亡者)를 추천(追薦)하는 사십구재(四十九齋) 형식의 수륙재가 거행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전쟁이나 자연재해, 전염병, 기근 등 사회혼란 속에서 백성을 위무하고 치유하고자 공익적 목적에서 수륙재가 자주 설행되었다. 이를 방증하듯이 수륙재를 여법하게 준행하기 위하여 각종 법식(法式)과 재차(齋次)를 정리한 각종의 의식집이 빈번하게 간행되었다.
수륙재라는 의례 전통은 근대 시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당시 수륙재의 설행 양상은 불교의례 전반의 흥쇠(興衰)와 궤를 함께하여 이해되고 있다. 관련하여 이능화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중략) 생각하건대 오직 이 도(道: 범패)는 서울 근처 산중에서 번성하였는데, 서울 근처 산중에 있는 승려는 참선과 강설에는 힘쓰지 않고, 오직 범패만을 숭상하여 『범음집(梵音集)』 1권을 10년 동안 공부하였다.
무릇 법회 의식이 있을 때에는 장구를 치고 징을 울리며 작법무를 추면서 빙빙 돌고 또한 범가(梵歌)를 유유히 맑고 고른 소리로 부드럽게 부른다. 이것이 이른바 화청(和請)․고무(鼓舞)․바라무(哱囉舞)․작법무(作法舞)라는 것이다. 대개 이 법식을 행하는 것은 시주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으니, 서울 근처 산중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사찰에서는 모두 이를 행하였다. 범패를 잘하는 이로는 서울 근처 산중의 승려를 으뜸으로 친다. 그러나 사법(寺法)이 시행된 이후로는 일체 폐지되었다. 화청․고무는 전혀 우아하게 보이지 않으므로 꼭 금지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어산조(魚山調)도 그것을 따라서 ‘광릉산(廣陵散: 거문고연주곡)’으로 하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1]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2010), 『역주 조선불교통사』6,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454-455쪽.
1918년 이능화는 수륙재를 포함한 각종 불교의례를 ‘범패(梵唄)’라고 통칭하며 조선후기 불교계에서 의례가 성행한 상황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시행한 사찰령에 의해 범패가 금지되었음을 밝혔다. 앞서 1911년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반포하여 사찰과 사찰에 소속된 인적·물적·지적 자산을 모두 통제하며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1912년에는 「각본산사법(各本山寺法)」을 제정하여 불교계에 대하여 제한 및 금지사항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제7장 ‘법식’조에서 “법회 의식의 방법은 종래에 거행하던 청규를 따른다. 다만 화청(和請)・고무(鼓舞)・나무(鑼舞)・작법무(作法舞) 등은 일체 폐지한다.”[2]《조선불교월보(朝鮮佛教月報)》 제7호, 「각본산사법(各本山寺法)」, 제7장 ‘법식’조. 라는 조문으로 범패를 공식적으로 금지하기에 이른다. 일제에 의한 범패 금지 조처와 더불어, 조선불교계 내부의 근대화 과정에서 의례가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었던 점도 불교의례에 대한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교의례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륙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불교의례가 지속적으로 설행되었다.[3]관련 연구에 따르면 근대 신문과 불교잡지에서 111건 이상의 불교의례 자료가 확인된다. 이를 의례 유형에 따라 분류하면 불탄일 초파일행사(38회), 수륙재(10회), 천도재(9회), 우란분재(8회), 만일염불회(4회), 재공양(4회), 영산재(2회), 조사추모재(2회), 부모은중회(2회), 기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한상길(2011), 「한국 근대불교의 의례와 범패」, 『한국선학』 29, 서울: 한국선학회, 269-270쪽) 언론 매체의 특성상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취사 선택되어 취재된다는 점, 당시 언론 검열·통제가 심하였던 점 등을 고려하면 당시 실제로 설행된 불교의례의 종류와 건수는 더욱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수륙재의 경우 원흥사, 봉은사, 강릉포교당 등에서 봉행된 사례가 확인된다. 전몰장병의 혼백을 위로하거나 수해로 인한 사망자를 위로하기 위한 목적을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당시 수륙재는 사회적 공공의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는 조선시대 수륙재의 전통과 그 의미를 계승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관련하여 안진호(安震澔)의 『석문의범(釋門儀範)』과 같이 수륙재 의문을 포함한 종합의식집들이 꾸준히 간인(刊印)되었다. 또한 서만월(西滿月) 스님, 동만월(東滿月) 스님 등 전문적인 범패승들이 활동하며 전수와 교육이 진행되었다.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2010), 『역주 조선불교통사』6,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454-455쪽.
- 주석 2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教月報)》 제7호, 「각본산사법(各本山寺法)」, 제7장 ‘법식’조.
- 주석 3 관련 연구에 따르면 근대 신문과 불교잡지에서 111건 이상의 불교의례 자료가 확인된다. 이를 의례 유형에 따라 분류하면 불탄일 초파일행사(38회), 수륙재(10회), 천도재(9회), 우란분재(8회), 만일염불회(4회), 재공양(4회), 영산재(2회), 조사추모재(2회), 부모은중회(2회), 기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한상길(2011), 「한국 근대불교의 의례와 범패」, 『한국선학』 29, 서울: 한국선학회, 269-270쪽) 언론 매체의 특성상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취사 선택되어 취재된다는 점, 당시 언론 검열·통제가 심하였던 점 등을 고려하면 당시 실제로 설행된 불교의례의 종류와 건수는 더욱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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