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설행된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첫째는 팔관회가 수륙재라는 설이다. 통일신라 진흥왕 33년(572) 10월에 외사(外寺)에서 전사한 사졸(士卒)들을 위해 7일간 설행된 팔관연회(八觀筵會)가 그것이다. 위령제가 수륙재의 성격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무차대회가 수륙재라는 설이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공신당을 설치하여 무차대회를 열어 상례화한 것이다. 이들 설은 팔관연회와 무차대회의 성격과 수륙재와의 관계가 해명되어야 한다.
수륙재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로는 고려 광종 19년(968)에 무차수륙회를 설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최승로가 상소문에 올린 무차수륙회와 ‘광종 무진 19년’에 베풀어진 재회(齋會)가 동일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1]『한국고전용어사전』 「수륙재」 및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륙재」에서는 970년(광종 21)에, 또는 971년(광종 22) 화성 갈양사(葛陽寺)에서 혜거(惠居) 국사가 고려시대 수륙재를 처음 시행하였다고 하는데, 모두 오류이다.(김혜경(2019), 「자기문절차조열 해제」, 벽암 각성 외, 김두재 옮김, 『석문상의초 외』,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80쪽.) 최근에는 갈양사의 혜거국사비의 진위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고 있다.(최연식(2018), 「고려초 도봉산 영국사 혜거의 행적과 사상 경향-신발견 탑비편의 내용 검토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제54호, 한국중세사연구회, 178-179쪽.
선종대(재위 1083-1094)에는 송나라에서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을 적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선종 6년(1089)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이라는 별도의 전각을 세울 정도로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년 보제사 수륙당에 불이 났다. 이보다 앞서 왕의 사랑을 받는 섭호부랑중 지태사국사 최사겸이 송나라에 가서 水陸儀文을 구해 와 왕에게 수륙당을 짓도록 청하였는데, 공사를 마치기도 전에 화재가 났다. [2]『고려사』 권10, 세가10, 선종7; 『고려사절요』 권6, 선종사효대왕, 경오7. “壬辰 普濟寺水陸堂火 先是 嬖人 攝戶部郞中知太史局事崔士謙 入宋求得水陸儀文 請王作此堂 功未畢而火.”
『고려사』 선종 7년(1090) 1월 17일 기사이다. 이로 미루어 수륙당이 건립되기 시작한 것은 그 전년도인 1089년으로 파악된다.
수륙재에 관한 의례집은 최사겸이 송에서 수입한 『수륙의문』을 비롯하여 이제현이 쓴 혼구의 비명(碑銘)에 스님이 편찬한 『신편수륙의문』 2권, 조선시대에 간행하여 현존하는 수륙의례집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천지명양수륙잡문』 등 고려 죽암이 편찬하거나 또는 고려시대에 쓰여진 발문 등 몇 편이 확인된다. 이들을 통해 볼 때 고려시대에도 여러 의례집이 수차례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간섭기인 1348년(충목왕 4)에는 충목왕이 병이 나자 공주가 전 찬성사(前贊成事) 이군해(李君侅)를 천마산(天磨山)으로 보내 수륙회를 베풀고 기도하였다. 공민왕 13년(1364)에 승의공주의 천도를 위해 나옹화상이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처음으로 설행하면서 설법을 하였다.
고려시대 수륙재의 설행 목적도 다양하였다. 첫째는 낙성고불식이며, 둘째는 불덕증득(佛德證得), 셋째는 치병(治病), 넷째는 액을 없애는 해액(解厄), 다섯째는 현전 기록상 가장 많은 횟수를 차지하고 있는 추선(追善), 여섯째는 공신들을 위한 공신재이며, 일곱째는 멸죄(滅罪), 마지막으로는 구휼(救恤)과 민심통합(民心統合)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 설행된 수륙재의 시기와 내용, 목적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 연도 | 내용 | 명칭 | 목적 |
| 태조23년(940) | ※ 新興寺에 공신당 설치, 삼한공신의 화상을 그리고 無遮大會를 매년 상례화 ※ 고종19년(1232)~원종1(1261) 중단됨 | 무차대회 | 천도·민심통합 |
| 광종19년(968) | 귀법사 설행(최승로 시무28조에 근거) ※ 왕사·국사제도실시 | 무차수륙회 | 멸죄(구휼·민심통합) |
| 광종22년(971) | 혜거국사 수원 갈양사에서 설행(비문의 진위여부 논란) | 수륙도량 | 수륙도량 건립 낙성식 |
| 성종1년(982) | 6월, 최승로 시무28조, 수륙재 언급 | ||
| 선종4년(1087) | 2월 초조대장경 흥왕사에서 완성 | ||
| 선종 6년(1089) | 최사겸, 송 『수륙의문』 수입, 수륙당 건립 청함. 보제사(광통보제사, 충숙왕대 연복사)에서 공사를 마치기전 화재(『고려사』 1090년 1월 17일기사이나 1089년부터 수륙당 건립 시작 추정) | ||
| 진정국사(1206~?) | 국가재정이 아닌 개인재정으로 백련도량, 만연정사, 조계사에서 설행 : 적멸의 근원을 알아 불덕 증득 | 수륙재 | 불덕증득 |
| 원종3년(1262) | 미륵사 공신당 중영, 매년 10월 설행 | 무차대회 | 공신 명복(冥福) 기원 |
| 충목왕4년(1348) | 11월 초하루 계사일에 공주가 왕의 병으로 전 찬성사 이군해를 천마산에 보내 수륙회를 베풀고 기도 ※경천사10층석탑 건립 | 수륙회 | 치병 |
| 이색(1328~1396) | 좌시중이 태후를 위해 해액(解厄)수륙재 설행 | 해액수륙재 | 액(재앙)을 풂 |
| 원천석(1330~?) | 2월 초2일 조카가 모친의 명희(명복)을 위해 수륙재 베풂 | 수륙의 | 천도 |
| 공민왕13년(1364) | 승의공주의 천도를 위해 국행(國行)수륙재에서 육도중생에게 설함 | 국행수륙재 | 천도 |
| 공민왕23년(1374) | 갑인 납월 16일 경효대왕(충렬왕) 영가에게 소참법문 설함 | 수륙법회 | 천도 |
· 집필자 : 불교민속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한국고전용어사전』 「수륙재」 및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륙재」에서는 970년(광종 21)에, 또는 971년(광종 22) 화성 갈양사(葛陽寺)에서 혜거(惠居) 국사가 고려시대 수륙재를 처음 시행하였다고 하는데, 모두 오류이다.(김혜경(2019), 「자기문절차조열 해제」, 벽암 각성 외, 김두재 옮김, 『석문상의초 외』,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80쪽.) 최근에는 갈양사의 혜거국사비의 진위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고 있다.(최연식(2018), 「고려초 도봉산 영국사 혜거의 행적과 사상 경향-신발견 탑비편의 내용 검토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제54호, 한국중세사연구회, 178-179쪽.
- 주석 2 『고려사』 권10, 세가10, 선종7; 『고려사절요』 권6, 선종사효대왕, 경오7. “壬辰 普濟寺水陸堂火 先是 嬖人 攝戶部郞中知太史局事崔士謙 入宋求得水陸儀文 請王作此堂 功未畢而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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