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기관 명칭 | 화계사 만일염불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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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기관 전화 | 02-902-2663 |
| 수행기관 주소 | 서울 강북구 화계사길 117 |
화계사 만일염불회는 월명(越溟)이 개인의 정재(淨財)를 사중에 희사한 계기로 1910년 12월에 시작하였다.
화계사 만일염불회(華溪寺 万日念佛會)는 사미(沙彌) 법우(法雨)가 지은 「삼각산 화계사 만일염불회 창설기(三角山 華溪寺 万日念佛會 刱設記)」에 의하면 1910년 12월에 시작하였다. 화계사의 월해(越海) 화상이 주관하여 월초(月招), 포응(抱應), 동화(東化) 등의 동참 대중과 함께 동화사의 월제(月齊) 화상을 화주(化主)로 모시고 열흘간의 강설과 법문으로 이어진 ‘80권 화엄산림 법회’를 회향하면서 곧이어 만일염불회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이는 50여 년 동안 정토왕생을 발원하며 염불 수행하던 월명 원유(越溟爰有)가 개인 재산을 사중(寺中)에 희사(喜捨)하면서 큰 계기가 되었다.
삼각산 화계사(대한불교조계종 삼각산 화계사)
원유의 호는 월명이다. 스님은 어려서 출가하여 염불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아 정토에 가서 태어나길 발원하며 50여 년을 정진하였다. 그러다가 홀연히 병고가 들어 몸이 점점 쇠약해지자 남은 삶이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짐작하고, 어느 날 월해 화상을 불러 말하였다.
“스님과 나는 사형(師兄) 사제(師弟) 사이이니 나의 뒷일을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올해 세납 70인데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니 목숨이 다한 것 같습니다. 나에게 평생 수용하고 있는 논이 양양(襄陽)에 있는데 몇백 두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승속 간에 남겨온 재물이 아니라 내가 입산 후에 빈손으로 이루어 근근이 생계를 도와 온 물건입니다. 어떻게 하면 옳겠습니까.”
월해 화상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월제 화상과 월초, 포응, 동화 스님들이 같이 있다가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월명 스님께선 예전부터 염불로써 날마다 공부의 업(業)으로 삼으셨으니, 이 정재(淨財)가 만일염불인(萬日念佛人)들의 월료(月料)에 쓰인다면 비록 천만년에 이를지라도 염불의 금고(金鼓) 소리가 도량에서 그치질 않을 것입니다. 단지 만인(萬人)의 염불을 권할 뿐만 아니라, 스님께서 서방정토에 가실지라도 그 이름은 본산(本山)에 머물러 흐르는 향기가 가히 백세(百世)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하니 이 어찌 세간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 아니겠습니까. 스님께서 깊이 생각하고 살펴주소서.”
이와 같은 대중의 목소리에 월명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서, 자신의 논 문서를 헌신짝 버리듯이 사중에 송두리째 헌납하였다. 모두 월명 스님의 숙세선근(宿世善根)이 깊고 두터웠음을 찬탄하였다. 월명이 희사한 전답의 수익금은 만일염불결사 동참자들의 수행에 사용되었다. 결사 내내 도량 안에는 북소리와 염불 소리가 가득하고 오래도록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 집필자 : 전통수행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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