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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만일염불회

봉은사 만일염불회는 염불수행을 위한 조직임에도 1940년대 봉은사 재건에 동참하여 절을 부흥시켰다.
옛 봉은사 모습(노덕현, 현대불교신문)
봉은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견성사(見性寺)라고 불리었으며, 연산군4년(1498)인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성종의 왕릉인 선릉(宣陵)의 원찰로 견성사를 중창하면서 봉은사(奉恩寺)로 개칭한 후 사세가 확장하였다. 이후 명종5년(1551)에는 문정왕후와 허응 보우(虛應普雨)에 의해 선종의 중심사찰로 지정되어 선과(禪科) 부활의 핵심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봉은사에서 근대적인 만일염불결사가 이루어진 시기는 1941년이다. 다른 사찰과는 다르게 봉은사의 만일염불결사 배경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근대 불교잡지인 『불교시보(佛敎時報)』(66호)를 보면 봉은사의 만일염불결사가 1941년 1월에 결성되었는데 염불수행이라기 보다는 가람의 중창에 그 목적이 있다고 적고 있다. 그내용은 “奉恩寺에서는 今後 及 萬歲樓의 建物建築의 祈願을 爲하야 1월부터 萬日念佛會를 조직하고 念佛首座를 請하야 念佛하기로 하는데 金應雲和尙이 自願 化主가 되어서 念佛會를 經營케되었다.”라고 한다. 실제로 봉은사는 1939년 화재로 인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요사채인 승당까지도 소실되었으므로 이를 복원하기 위한 불사로서 만일염불결사가 시행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그동안 여러 사찰의 만일염불결사에서는 염불 수행 보다는 사원의 중창 등 불사를 위한 결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봉은사처럼 가람의 중창을 위하여 만일염불결사를 결성한 경우는 드문 경우이다. 당시 봉은사의 만일염불결사에는 승속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던 것이 기록에 나타난다. 특히 1941년 8월에는 성욱을 비롯한 출가자들 및 여러 재가자들의 헌답(獻畓)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봉은사 입구에 남아 있는 헌답공덕비(獻畓公德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봉은사의 만일염불결사가 염불수행이라는 목적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다. 염불수행은 수행대로 진행하면서 중건 불사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모범적인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봉은사는 만일염불결사의 염불공덕과 결중들의 헌신적인 동참으로 결사후 얼마되지 않아서 대웅전과 동서의 양승당을 세우고 선불당을 상량하였으며, 이듬해인 1942년에는 영산전, 북극전, 만세루, 천왕문, 산문 등을 세워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봉은사가 어려운 위기를 극복하고 복구불사를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하여 만일염불결사라는 방법을 채택한 것은 당시 불자들 사이에 만일염불결사에 대한 깊은 믿음과 신앙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봉은사의 중창 복구는 만일염불결사의 공덕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 집필자 : 전통수행팀

관련자료

  • 신앙결사연구
    도서 한보광 | 여래장 | 2000 상세정보
  • 19세기와 20세기 초 염불당(念佛堂)의 수용
    학술논문 김지헌, 전봉희 | 건축역사연구 | 28권6호 | 한국건축역사학회 | 2019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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